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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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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질서

/ 야망 /

신대현 목사

야망과 파당
옳다 인정을 받는 것
진리의 야망을 쫓기 위한 성경의 지침
인간적 야망과 질투
종이 되는 것
회심―하나님의 목적의 발견
자기 부인과 자기 절제
선한 야망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 디모데전서 6:11-12

야망과 파당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 소개된 육체의 일들 중에는 '당 짓는 것'이 있다. 신국제역(New Internation Version: NIV)은 'selfish ambition(이기적 야망)'으로, 신개정표준역(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은 'quarrel(다툼)'이라고 번역했다. 헬라어로는 '에리데이아(eritheia)'로서 '이기적인 야망, 다툼, 분개'란 뜻이다. 헬라어 의미에는 야망과 다툼이 한 단어의 정의에 다 들어있는데, 이는 이기적 야망을 내세우는 곳에 당연히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는 현실을 참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야망을 다룰 때 파당이나 다툼을 같이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8-19절에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의 파당의 불가피성을 말한다,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이 말한 바는 어떤 뜻인가? 바울은 파당을 지지한 것인가?

사람들 가운데 내재된 죄성(罪性)은 언제 어느 때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나타낼지 모른다. 이 땅에 사는 자들은 그러한 성향의 잠재력을 모두 지니고 있다. 사람마다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목적을 따라 가느냐에 따라 자기중심적인 성향의 정도는 달리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파당은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옮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나타나는 것도 필연적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이 세상에 온전한 나라가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기중심의 삶을 완전히 벗어버린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파당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옳다 인정을 받는 자들이 나타날 때 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무리에 속해 있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나타낼 현실이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옳다 인정을 받는 것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흔히들 사람들은 옳다고 여기는 자기 생각이나 타인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택하여' 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의미로 인정받는 것이면 또 다른 자기주장의 결과일 수 있다.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은 일차적으로 어디까지나 먼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혀 수동적이 되라는 말인가? 자기 삶을 포기하란 말인가?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라는 말인가? 모두가 아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앞서 진리가 말씀하는 바를 '주체적으로' 경청해야만 한다. 이 자세는 진리 안에서 현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길 때까지 행동보다 주 앞에 서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움직일 때가 되면 사람의 다수나 환경의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깨달은 진리 안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쪽을 따라 결단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신 있는 주체적 행동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적인 야망은 잃어버린 자이지만, 그렇다고 좌절한 자는 아니다. 그의 야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회심과 더불어 '진리의 야망'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진리의 야망은 무엇이며, 진리 안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옳은 쪽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의 야망을 쫓기 위한 성경의 지침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이기보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정말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 후 확신이 생길 때 그 사람의 말에 마음을 열 준비를 한다. 무엇을 시사하는가? 삶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람의 말은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빌어서 말한다 해도 힘을 갖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말 삶이 신실한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진리 안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옳은 쪽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을 검증할 수는 없다. 사람은 어떤 생각에 몰두하다보면 그 생각대로 상황을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사실 저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떤 심각한 상황인가? 그것은 성령 안에서 진리의 옳은 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파당의 한쪽을 쫓게 되는 상황이다.

우리에겐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더 객관적인 성경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인간의 야망이 아닌 진리의 야망을 쫓을 수 있기 위해서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성경적 지침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파당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으며 진리의 옳은 쪽을 따르는 확신을 대다수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보이는 객관적인 기준은 여러 가지겠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제시한다면 다음의 구절일 것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3-16)

인간적 야망과 질투

선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서 야망을 가질 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결과인 반면, 악한 일 곧 인간의 시기와 다툼이 자아낸 결과는 그 배후에 인간의 야망이 숨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인간의 야망은 내재된 생각을 지나친 열의(熱意)로 변화시켜 악한 일을 낳는다. 그리고 그 열의는 시기와 질투를 일으킨다. 자신의 질투만이 아니라 주위의 질투까지 유발한다. 내 안의 질투는 다른 사람의 부각된 모습을 볼 때 생겨나며, 타인이 나를 향해 가지는 질투는 내가 나의 것을 매우 부각시킬 때 생겨난다. 자의든지 타의든지 질투는 어디까지나 ‘내’ 안에서 혹은 ‘나’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질투가 일어날 때는 대부분 이기적인 야망이 이미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출발은 좋은 비전이었더라도 변질된 인간적 야망이 생각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기적 야망은 자기의 것을 더 이루려 하든지 다른 사람의 것을 이겨보려 하는 야망이다. 그러니 질투를 유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면 왜 사람의 생각은 언제 이러한 인간적인 야망으로 발전하는가? 그 시작점은 언제인가? 그것은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모든 사람들을 인격체가 아닌 성취의 발판이나 수단이나 모델로 정의하기 시작할 때이다. 이 모습은 겉으로는 매우 열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세상은 성취를 향해 뛰고 있는 사람을 인생을 앞서 질주하는 경기자로 추겨 세운다.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을 인간시대의 성공의 모델로 앞세운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병든 상태일 수 있다. 그 뿌리에는 삶을 스스로 다스리는 자치적(自治的) 자아가 있다. 이 자아는 삶의 의미를 자기 행동 안에서 찾고, 자기 성취로써 가늠한다. 그래서 그러한 방향이 그릇된 열의를 내게 만드는 것이다.

종이 되는 것

이에 대한 예수님의 해결책은 '종이 되는' 것이다(마 20:26-28). 종이 되는 곳에는 시기가 사라진다. 종이 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도대체 왜 종이 돼야 하는가? 이 질문은 차치하고, 종이 되어서 모든 시기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해도 얼마나 그것이 힘들 것인가? 그래도 자의적으로 종이 되는 노력을 해서 시기가 없어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해 볼만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는 없어지자 않는가? 더 심하게는 기독교 없이 자신을 낮추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도 선한 야망을 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담의 타락한 죄성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자연스럽게’ 자기를 낮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 금욕의 자세를 가져도 순간 폭발하는 교만을 억제하기가 힘든 게 타락한 죄성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오직 철저히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자세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굽히는 삶은 굴종이 되든지 자기 연마나 각고의 수도(修道)를 통해 노력한 산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인식은 철저한 소속감과 연결되어 있다. 무익한 야망은 소속을 모르는 자들에게 생긴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19-20). 시기를 버리고 자연스러운 섬김의 모습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시민권이 예수 그리스도가 기다리고 계신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약육강식의 밥그릇 싸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허무하게 끝나는 영광을 위해 생의 바퀴를 굴리는 열정에서 올바른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 준다.

회심―하나님의 목적의 발견

한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인 열정을 버리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것과 자신의 참 소속을 발견하는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회심 때이다.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때이다. 그러한 자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이후는 성령의 야망이 그를 이끌어 간다. 우리의 야망은 땅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 변하여 하나님의 기울이시는 관심과 일치되는 것을 통해서 구속(救贖)이 된다.

자기 부인과 자기 절제

하지만 인생은 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처음 회심을 한 후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살면서 계속하여 자신을 다시 이겨 나가는 체험을 한다. 이것은 자기 증오가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갈 5:24) 어떤 종교에서의 고행과 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자기 부인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자치적으로 살아가려 하는 태도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징계하시며 연단해 가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손아래에서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다(벧전 5:6).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바의 의미는 남보다 앞선 것으로써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유혹을 포함한 모든 육체의 욕망과 행위를 중지하며, 하나님의 판단에 내맡기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 절제의 열매가 생긴다. 자기 절제는 하나님의 의지를 깨달은 인간이 그것에 반응할 때 생기는 열매이다. 자기 절제는 우리로 하여금 전인적인 자아를 조화 있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 주면서 삶을 통제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결국 자기 절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낳는 부산물인 것이다.

선한 야망

다시 강조해서 말하면, 끊임없이 성령의 야망을 쫓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목적 곧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빌 3:14)과 우리 자신의 참된 소속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참 신앙인들을 통해서 성령의 야망을 쫓는 모범들을 발견한다. 이것이 그들이 보여준 ‘선한 야망’이다. 어떤 사람들은 참 신앙인들의 야망의 모양만을 취하여 자기의 육신의 야망의 모델로 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의 선배들의 야망 뒤에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소속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인식을 삶에 투영하여 삶을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려 했던 담대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선한 야망으로 삶을 이끌어가야 한다. 그렇게 이끌리는 삶은 역으로 그 선한 야망을 지켜간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회심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주신 선한 야망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영성의 표현이 되어서 매일의 삶 가운데 자신을 깨달아 가고 자신을 훈련시켜가는 동력이 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전 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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