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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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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질서

/ 지도자와 권위 /

신대현 목사

권세로 이뤄진 하나님의 세상
교회의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는 개인인가 여럿인가?
지도자의 자질
하나님의 종
지도자의 역할 모델
지도자의 책임
지도자가 맞는 문제와 해결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에베소서 2:20-21

권세로 이뤄진 하나님의 세상

교회의 지도자는 필요악인가 아니면 준(準)신적 권위인가?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대 그 가운데 지도자가 선다는 것은 모순인가? 이러한 질문은 지금에서만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초대 교회의 규모가 가정 모임의 울타리를 넘어서 조직체로 발전된 이후에만 아니라 과거 삼천 오백년경 전 모세 시대에도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3).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지도자를 인정하신다. 성경은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의 지도력에 도전했던 자들을 여호와께 패역을 행한 자들로 규정한다(민 26:9). 구약만이 아니다. 신약의 상황에서도 데살로니가 5장 12절은 회중을 다스리는 교회의 지도자를 가장 귀히 여기라고 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 범위를 넓혀 세상 권세에게 굴복하라고 명령하신다. 그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으로서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경고하신다(롬 13:1-2). 이처럼 지도자를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는 매우 확고하시다.

사실 하나님의 세상은 권세의 질서로 이뤄져있다. 하나님의 절대 권세 아래에서 모든 피조물은 제마다 각기 자기에게 부여된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죄는 그 질서를 거스려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죄였고, 사단의 타락도 마찬가지였다(겔 28:14-17).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은(요 1:12) 하나님의 질서 밖에 살던 죄인을 하나님의 질서가 흐르는 ‘하나님의 세상’에서 제 위치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자격 부여이다.

보이는 세상(롬 13:1)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엡 6:12)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이 권세의 질서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 명령하는 자와 순종하는 자, 책임을 가진 자와 그 아래서 돌봐져야 하는 자의 분명한 구분은 절대적이다. 지도자와 권위는 그 타당성과 필요성 여부를 놓고 논쟁할 주제가 아니라 그 절대성을 성경적으로 재발견하고 바르게 정립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

세상은 지도자를 정의할 때 ‘조직이나 단체 따위에서 전체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까? 교회의 지도자를 정의할 때에는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은 교회 전체를 이끌어 가는 자들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란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를 국어사전적으로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그들의 지도력은 결코 위가 없는 절대 권세가 아니다. 교회의 머리 곧 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아래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지도자들은 구약 시대에서처럼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의 역할을 했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에 견줄 수 있는 자들인가? 아니다. 그러한 중보의 직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오히려 교회의 지도자들은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력에 함께 참여하여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섬기고 있는 자들이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섬기는 일에서는 단지 지도자들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이 다같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모든 믿는 자들의 선지자 사역과 제사장 사역과 통치 사역이 뚜렷이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모든 믿는 자들의 선지자 사역),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 사역; 참조, 벧전 2:9; 계 1:6),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10, 모든 믿는 자들의 통치 사역; 참조, 벧전 2:9).

교회의 지도자는 개인인가 여럿인가?

그렇다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다시 강조하고픈 것은 지도자들을 정의할 때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자들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이제껏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운영되어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이 이끌고 나가신다. 이 진술은 보수 진영의 사람들 듣기에 좋으라고 내세우는 모토가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고 계시는 이상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지는 곳이지 결코 사람의 경영 성과의 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혜로 교회를 세우지 않으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이끄신다. 그러므로 지도자들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교회의 운영에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가르치고, 관리하고, 조정하고, 돌보고, 갖춰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성숙함으로 자라가게 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도와줌으로써(엡 4:13),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이 교회와 세상에서의 사역에 준비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궁극적으로 교회 지도자의 목적은 교회를 이끄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람들을 준비시켜서 참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시켜 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8-12).

교회는 이러한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서 한 개인에게 권한을 몰아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도력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목사나 장로 한 사람의 기업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니 얼마든지 한 사람이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자청할 수 있지 않겠으며, 사람의 표밭을 잘 기경한 사람이 지도자로 나서기는 너무 손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수의 성도들이 지도 체제를 명령 하달의 계급 체제로 이해하고, 그러한 원칙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하며 따르는 이상 누가 교회의 그 ‘최고 계급’에 도전하겠는가?

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지도자는 계급으로 나뉘지 않고 역할로 나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이 상황이나 정황에 따라서 여러 지도력의 다양한 모델들―장로, 감독, 집사, 복음 전도자, 사도, 선지자, 교사 등을 제시하고 있음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역할들이 상합하고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뤄가는 지도력이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인정하시는 참 지도력인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어떤 ‘개인’도, 심지어 은사가 넘치고 경험이 풍부한 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히’ 가진 자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어떤 개인 안에서가 아니라 당신의 몸인 교회 안에 ‘충만히’ 거하시기 때문에(엡 1:23) 복수의 지도력이 되어야 함은 모든 교회의 규범이어야 한다. 복수의 지도력이 된다고 해서 모양으로만 동일한 역할의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을 세운다는 얘기가 아니다. 목사 두 사람을 동시에 담임목사로 세웠다고 해서 복수의 지도자를 세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역할이 다 다를지라도 서로가 협력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복수의 지도력이다. 당회의 역할이 잘 운영되면 얼마든지 복수의 지도력을 세워갈 수 있다. 그 안에서 서로가 자기의 맡은 역할을 분담하면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교회의 지도력을 발휘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서 자라가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한 개인이 교회의 지도력을 대변할 수 없다 해도 각 역할마다 가지는 책임의 분량이 있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권세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지도자가 다 동일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며, 모든 성도가 그것을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용되거나 오용되면 일인치하의 조직으로 변질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들의 책임과 권세의 차이가 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발적인 대안을 마련하여서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려 한다든지 세상 법을 의지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회중의 주권과 다르고, 세상의 법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의 도에 우선할 수 없다.

교회가 일인치하의 조직이 된 상황이면 그것은 결과만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이며, 그 책임은 지도자에게만 있지 않고 그 과정에 참여한 모든 회중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다루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지도자에게 임하는 것은 물론이요, 온 회중도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질문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면하는 길은 ‘온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세우는 것뿐이며, 결코 지도자 한 사람을 갈아 치는 것으로 새 길을 찾을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교회의 비리를 매스컴과 법을 통해서 해결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실제성과 오래 참으심을 우습게 여기는 처사이며, 성마른 인간들의 호응을 얻고자 자기 정당성을 내보이려는 정치 공세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블레셋의 수도인 가드에 고하지 말 것을 엄중히 명했다(삼하 1:20). 결코 형제의 비극을 떠벌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흐르는 원리가 되어 후세에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비극을 맞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다시 인용되었다(미 1:10). 현대라고 다를 수 없다. 매스컴이 무엇이며 법이 무엇인가? 우리 안에서 일어난 일을 왜 구경거리와 말거리로 세상에 내보여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상처를 세상에게 내보인다한들 그들이 치료약이라도 줄 것인가? 그들은 예수님의 몸에 못을 박은 자들이다. 오히려 상처를 즐거워할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의 몸을 유희거리로 내어줄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매스컴을 이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의인들’에 의해서 다시 시장에 조롱거리로 내쳐지는 격이다.

지도자의 자질

교회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을 논할 때면 성경은 분별력 있는 영적 은사의 유무보다 인격의 성숙을 앞세운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 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1-7).

왜 영적 은사보다 인격이 앞서는가? 일반 성도들이 도덕으로, 관계로, 재정으로, 성으로 범하는 죄는 교회의 치리에 의해서 곧바로 다뤄지고 또 회복될 수 있지만 지도자들이 잘못이나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지도력의 신뢰의 상실은 물론이요 성도들의 확신이나 존경이 심각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격은 결코 지위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위에 앞선 자질이다. 목사가 되고 나서 목사의 지위로 인하여 인격이 갖춰지거나, 장로가 되고 나서 장로의 인격이 갖춰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경이 제시한 조건은 그 지위 이전에 있어야 할 인격이다. 그렇다고 완성된 인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러한 자질이 ‘확인될 수 있는 인격’이어야 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위에 전제된 인격보다 지위에 따라오는 인격을 갖춰가려 하거나 요구한다. 전제된 인격을 검증하는 데에는 너무도 소홀하면서 막상 사람을 세워놓고는 목사이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성품이어야 하고 집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달라야 하며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성품을 지녀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주(主) 안에서 실생활로 말미암아 갖추어진 인격이 아닌 이상―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훈련받아서 다듬어진 인격이 아닌 이상, 그것은 드러나기 전까지만 감추어져 있는 이중인격일 뿐이다.

인격을 내세우다보면 인격만으로 지도자를 세우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도덕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의 인격과 하나님의 말씀이 내세우는 인격 사이의 차이를 구분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인격이 세워지는 데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 배후의 원리일 때에만 가능하다. 영적인 성숙함이 전제되지 않은 인격은 회칠한 무덤일 뿐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에게 영적인 성숙과 분별력은 절대적이며 필연적이다. 교회의 일에서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영적인 전쟁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무장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도자의 본질적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조그만 역할의 직분을 세우더라도 반드시 세워지는 사람의 영적 성숙을 살필 책임이 있다. 교회가 어떤 지도자를 세웠느냐는 그 교회의 영적 수준과 비례하며, 그 지도력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교회 전체의 책임인 것이다.

실제 현장에서 지도자의 영성은 지도자들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지도자들이 각각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로 여겨지고 있더라도 그들 사이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기가 힘든 상황이면 반드시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조화를 이루는 것은 지도자들의 연합이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모든 지도자들은 상호 영적인 조화에만 머물게 아니다. 현재의 은사를 통해서 영적인 조화를 이루면서도, 더 견고한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전 12:22-31). 그래서 상호간의 조화의 폭을 넓혀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로’ 세워가는 지도자들의 바른 모습이다.

하나님의 종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람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지도자는 성도들을 섬기는 모습을 가져야지만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따라주는 식의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탈진해 버리는 지름길이다. 자기도 망치고 남도 그릇되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요구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며,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다는 행동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종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란 교회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관심사와 우선순위를 찾고, 그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옳은 뜻을 구하고 찾는 참된 ‘하나님의 종’만이 사람에게 메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가장 깊은 필요들을 채워주고 그들을 섬길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지도자의 역할 모델

지도자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역할 모델이 중요하다. 역할 모델이라 함은 성도들이 서로에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며,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왜 지도자의 역할 모델을 지도자가 아니라 성도들 모두가 서로에게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모든 성도들이 언제가 세워질 잠재적인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책임은 현재 세워진 지도자들이 하되 지도자의 역할 모델은 모두가 배우고, 익히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피차 복종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왜 피차 복종인가?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피차 상호적인 관계가(창 2:24) 바뀌어 서로를 지배하려는 관계가 되는 저주가 임했지만―‘너는 남편을 사모하고(히브리어, ‘반항하다(revolt)’는 의미)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교회는 그 관계가 바르게 세워진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의 관계가 서로를 지배하려는 관계로 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바도 아니었고, 의도하신 바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거역의 죄를 지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깨닫고 그 책임을 짊어지도록 허락하신 것이었다.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이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 이것을 입증해 준다. 그러하니 피차 복종함이 없이 어찌 죄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서로 관계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구원 받은 자들이 삶을 나누는 새 터전이기 때문에 더욱 서로 복종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책임

이러한 피차 복종의 모습 가운데서 지도자들에게는 세 가지 본질적인 책임이 주어진다. 첫째는 가르치는 책임이다. 가르쳐야할 내용을 결정하고, 인도하고, 감독하여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숙해 갈 수 있게 하는 책임이다. 이때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모습이 있다. 지도자는 이런 저런 유행하는 가르침에 휩쓸려서 성도들로 하여금 이리 저리 하나님의 말씀에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에게 바르고 확고한 성경적 신학이 세워져 있어야 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둘째는 교회의 질서를 지켜가는 책임이다. 교회 안에서 지도력의 자질과 은사를 가진 성도들을 분별하여 세우고, 복음 사역과 대외적인 사역에서의 균형을 이루며, 어려운 목회적, 도덕적 상황들을 다루어 가는 것이다. 셋째는 방향성이다.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분별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며, 우선순위를 이루기 위한 재정과 인력을 잘 조절하는 책임이다.

지도자가 맞는 문제와 해결

목회철학

실제적인 현장에서 지도자가 맞는 문제들은 무엇인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들부터 살펴보자. 가장 큰 원인을 살피자면 그것은 지도자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그중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목사 개인의 목회철학이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목회철학은 담임 목사의 목회에 대한 생각이나 노선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성경적으로 이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한 사람의 철학으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은 ‘철학’을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로 정의한다. ‘목회철학’이란 말이 아무 비판 없이 너무 쉽게 사용되기 때문에 이 용어 사용에 시비를 걸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굳이 위의 국어사전적 뜻을 고려하자면 이 용어는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사용할 말이 아니다.

교회는 한 개인의 목회철학을 따르기보다 공동의 지도력이 제시한 ‘목회방향’을 따라야 한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바른 모습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권한 안에서 공동의 지도자 모임 앞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기의 목회철학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목사에게 주어진 권한이 아니다. 교회 지도자 모임은 담임 목사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한 각 역할을 맡은 지도자 모임의 구성원들이 제시한 의견들을 수렴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각 지도자들에게 동일한 마음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며, 한 마음으로 교회의 방향성을 결정하여 이끌어 가는 것이다.

지도자에게 기도가 중요하고 기다림이 중요한 것은 교회는 일을 해서 결과를 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업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몸인 인격체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일 처리를 빨리 하느냐 늦게 하느냐, 어떤 이벤트를 일으킬 것이냐 말 것이냐에 중점을 둘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이 다 연합되어 한 몸으로 건강하게 자라가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하다가 일의 진행이 늦어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교회는 성취가 목적이 아니라 성장이 목적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바른 방향으로만 가면 하나님은 늦어진 시간만큼의 보충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반드시 해 주신다.

지도자와 회중

지도자가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성향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가려는 경우 대다수의 성도들이 고등 교육을 받은 자들이고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경험을 사회에서 많이 가진 자들이면 반대에 부딪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지 않다 해도 권위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문화에서 권위에 반발하는 게 일상의 태도가 된 사람들 가운데 목회하는 지도자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질문에 부딪치고, 따르는 자들을 갖기보다 뒷덜미를 잡는 자들 가운데서 우왕좌왕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맞으면 사람들은 지도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책임을 물으며, 미지근한 일 처리에 비난을 가하기가 일쑤이다.

대조적으로 지도자가 모든 사안을 평등하게 민주적으로 처리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가면서 일하려 하는 경우 보스를 원하는 블루칼라의 교회에서는 확실한 노선을 제시하는 지도력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각 지역 교회가 가지는 독특한 정황이다. 한 곳에서 잘 행하던 지도자라도, 다른 곳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보장하지 못한다. 지도력은 결코 정황을 뛰어넘어 이전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서울의 큰 교회의 목사라고 해서 공장 근로자들을 상대로도 잘 목회하리라고 자신할 수 없고, 미국에서 목회를 잘 하던 목사가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지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일 때에 목회자나 지도자들 편에서는 무력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바른 정황을 분별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교회 편에서는 자기들이 세운 지도자가 어떠한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려 하는지를 이해하는 자세를 가지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힘의 논리이다. 누가 헤게모니를 쥐느냐에 따라 교회 방향이 달라진다는 생각에서 지도자와 회중이 서로 양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힘이란 권한을 ‘먼저 갖는 것’이 아니라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자원을 주고, 정보를 주고, 기회를 주고, 용기를 주어서 그것을 통해서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능력 있게 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지도자와 회중은 서로에게 이런 역할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회중이 교회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일 처리를 잘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로 섬기는 일을 하게 했느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세상의 힘의 논리를 배격하는 길이다.

셋째는 언어의 문제이다. 참된 권위는 명령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권면과 덕을 세우는 말로 전달된다. 지도자의 말은 통제하려는 욕망보다 사랑에 기반을 둘 때, 곧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하려 할 때, 비록 세상적인 권력 행사의 측면에서는 허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힘을 행사하는 데에는 진정한 권세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따르는 훈련의 부족이다. 다른 사람의 지도력을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의 부르심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를 인도하는 자들을 신뢰해야 한다. 지도자들도 실수를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롬 8:28). 그리할 때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이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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