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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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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질서

/ 부르심 /

신대현 목사

이원적 사고
하나님께로 부르심 받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확인
변함없는 하나님의 부르심
부르심과 공동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능 
나를 준비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인생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빌립보서 3:12-14

이원적 사고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취향대로 직업을 택하지만 사역자에게는 부르심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는 평신도의 일은 직업이고, 목회자의 일은 성직이란 개념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이원적(二元的) 사고는 적어도 신약의 초대 교회에는 없던 것이다. 성경은 온 성도들이 제사장임을 선포한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 2:9).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성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목회자는 교회를 세워 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직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들만이 ‘거룩한 직분’으로 세워진 자들이 아니다. 그들만을 성직자로 여기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가르치는 직분에 있는 자들을 성직자이기보다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18).

직업에 대한 이원적인 접근은 중세 수도원주의의 결과이다. 수도원주의의 영향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대한 두 가지 접근이 생겨났다. 하나는 사회 안에서의 일반적인 길과 다른 하나는 수도원이나 사제로서의 영적인 길이다. 부르심은 영적인 길에서 요구되는 것이라고 여겨졌고, 이에 따라서 일반적인 길에서 영적인 길로 들어서는 것이 성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격한 결정들이 따라야 한다는 통념이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면 신학교를 가는 고민을 한번쯤 해 본다. 신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길로 들어선다는 식의 사고이고, 그에 따라 엄청난 변화가 삶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역자들만 신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이미 이원론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이다.

과연 사역자로의 부르심은 신학 공부로 확인되는가? 신학 공부를 중도에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길을 버린 것인가? 신학을 하면 자기가 지금껏 해왔던 모든 일에 대한 가치를 버려야 하는가? 평신도 중에서 과격한 결정이 없이 자신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증거들을 말할 수는 있는 자는 없는가?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러한 과격한 결정을 필연적으로 일으키는가?

하나님께로 부르심 받음 그리스도인

이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로 잡으려면 그리스도인이 일이나 장소로 부르심을 받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일이나 장소로만의 부름을 생각하기 때문에 대단한 결정의 순간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부르심이 없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을 아는 관계에서 표출되는 자연스러운 표현이지 과격한 결정들의 결과일 수 없다. 결정이 과격하면 할수록 그것은 나의 의지의 결단일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인격을 만난 자에게만 인생의 삶을 바쳐 수고할 비전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는 것을 우선 생각지 못하고, 쉽게 일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 그것은 흔히 하나님의 부르심의 출발선을 예수님의 지상 대명령으로 삼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이 명령의 대상은 ‘열 한 제자들’이었고, 또한 우리들이다. 그런데 더 관찰할 것이 있다. 과연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지상 명령으로부터 출발했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먼저 사람을 하나님께 속하게 하려는 부르심이었다. 이것은 인생이 어떤 비전으로 덧입기 이전의 부르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이 일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6-31),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확인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은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하는 곳은 ‘일 터’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부르심이야말로 가장 과격한 결정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의와 멀어져 있던 거리에 비례하여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이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1:37-3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일에 대한 결정을 중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머물려 하는 태도를 우선해야 한다.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가지는 사랑의 관계가 항상 확인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추궁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사랑을 물으시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워주셨다. 사랑이 확인된 후에라야 하나님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21:15).

우리가 흔히 일 중심으로 생각해 왔던 부르심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가 정립된 그리스도인이 삶 전체로써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가지는 책임과 같은 것이다. 그 책임을 수행하려면, 우리의 성경적 출발은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란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은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섬기는 주인이 바뀌는 중요한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싸움이 일의 성취에 있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삶에서 증거로 나타내는 데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1-12).

변함없는 하나님의 부르심

우리의 부름이 성취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일이 잘못되어질 때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그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하여 첫발을 내딛는 걸음과 같다,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그리고 첫발을 내딛은 이후로 그 부르심은 우리로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케 한다. 이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은 우리가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선포할 우리의 참 신분이며, 이 신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러한 우리가 단기적인 성취에 초점을 맞춰 살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성취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야 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4:1).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영원한 가치들에 대한 표현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부르심과 공동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부르심을 개인주의화 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부르심에는 공동체의 특성이 담겨 있고, 상호 책임성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1-3). 이 부르심이 개인적이 될 때, 그것은 개인의 경력과 전문화로 말미암은 자기 성취 이상이 되지 못한다.

위에 언급된 에베소서 4장 1절이 말하는 부름, 더 정확히 말해서 ‘그 부름(the calling)’은 에베소서 2장에서 언급된 새 창조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나누는 것과 하나님의 성전의 부분이 되어 그 성전을 함께 지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그 부름’은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동체의 정황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실례(實例)를 사도행전 16장 9-10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이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아시아로 향하려 했을 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방향을 틀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으나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않았다. 바울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성령이 바울을 막았겠는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야 바울보다 열심을 가진 자가 없을 것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의 열정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공동체의 요구와 맞물려야 했기 때문에 성령이 바울을 막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능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헌신과 공동체의 정황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삶에서 부르심을 주신다. 바로 이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일’이다. 하나님은 일을 주실 때 먼저 사람에게 재능을 주셔서 당신의 목적을 이뤄 가신다. 하나님은 결코 일 중심이 아니시며, 사람 중심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먼저 그 사람에게 필요한 재능을 갖게 해 주신다. 일은 그 재능에 맞게 따라오는 것이지 결코 앞서지 않는다. 재능이 갖춰질 때까지 하나님은 사람을 훈련시키시길 마다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결국에 일이 주어질 때 하나님의 부르심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 확인된다. 또한 그 부르심이 임하는 사람이 임의로 뽑히지 않고 특별히 지목되고 지명된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오홀리합을 세워…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출 31:1-11).

그러므로 개인의 재능과 기술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거저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하여 교만이나 무시함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사람을 볼 때 바르지 않은 태도와 바른 태도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0장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7절)… 우리가…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7a, 12, 13절).

하나님은 모든 인생에게 각각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재능대로 일을 맡기시며, 맡은 사람이 그 분량의 범위 내에서 열심을 다할 때 인생이 마쳐지는 날 동일한 칭찬을 해 주신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트 받은 자…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 25:15, 23).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에게 각자의 재능대로 책임의 영역을 부여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남들이 이루는 성취와 나의 성취를 비교한다. 그리고 자기의 재능 없음을 탓한다. 이것은 재능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재능을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가치로 보지 않고 항상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왜 우리는 상대적인 평가에 길들여져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에 의해서 평가받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지 못할 때 가지는 ‘상대적 열등감’의 상처를 오랜 세월 우리 안에 남겨왔다. 부모조차도 자식을 절대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대중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자아와 자기 재능대로 대접받을 곳을 찾기가 너무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과연 대중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예수님은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평가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 7:13). 대중의 지지를 받고, 대중의 요구를 따라 사는 것이 진리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고 해서 나의 자아가 진실하게 표현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다(마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참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의 참 생명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대중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행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나를 보거나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인생 안에서 내게 맡기신 책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할 생각이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각 사람의 인생을 이끄시면서 준비시키시는 모습과 그 준비에 따라 맡기시는 일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만의 독특한 재능을 아시고, 그 재능에 따라 일을 맡기시며, 그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길 원하신다. 우리가 일에 적극적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섬김’보다 대중에게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나에 대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와 다른 차이였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 25:24, 25).

만약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남겨 드리려는 목적으로 쓰지 않고, 자기의 삶에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쓴다면 우리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말을 듣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귀한 인생을 허비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시며 항상 당신의 목적으로 이끄신다. 오히려 우리의 앞질러서 행하는 노력이 조급함과 좌절감을 낳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합당하게 주어진 일조차 마다하고, 쉽게 포기하는 일이 잦아진다. 항상 직업을 탓하며, 새로운 일을 가져보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산다. 하지만 직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주된 원인은 일하는 장소나 일의 성격에 잘못이 있기보다 자기의 탐욕에 굴복하여 현실을 불만의 눈으로 보기 때문일 수 있다.

나를 준비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지내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그 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나의 모습에 대한 가치를 알아야 한다. 요셉의 경우를 보자. 그의 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대부분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요셉을 통해 이루실 일을 조금씩 예비해 가셨다. 종살이 할 때에도 팔려간 집의 가정 총무가 되게 하셨고,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갔을 때에도 감옥의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게 하셨다. 이러한 일련의 준비는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 전국을 치리하는 총리가 될 수 있는 길을 닦는 진행이었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는 말 안에서 우리는 요셉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요셉을 준비해 오신 손길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창 39:2-4; 41:37-39). 요셉의 명철과 지혜는 오랜 세월 하나님의 준비하심이 영글어 낸 열매였던 것이다.

모세는 또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보여준다. 모세는 세상 말로 하면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했던 자였다(행 7:22). 그는 화려한 애굽 출신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한 순간 일이 틀어져서 미디안 땅으로 도주하게 되었고, 그곳에 묻혀 사십 년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일개 미디안 출신의 목자가 되어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인생의 지는 황혼을 바라보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모세의 인생은 달랐다. 하나님은 모세의 과거와 현재를 합하셔서 전혀 새로운 일을 성취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하나님은 애굽 출신의 지도자와 미디안 출신의 목자를 연합시키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내는 여호와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이다. 모세는 궁중의 화려함에서 갑작스러운 시골 생활로의 변화, 그리고 다시금 지도자로 세워지는 팔십 평생의 인생 경력을 거치면서 그의 삶에 목적을 두고 행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깨달을 수 있었으며,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인 민족 지도자가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인생

이로 보건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인생이 비록 삶에 대한 조정과 결정과 방향 선회와 실수로 가득하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결론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우리는 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려 하지 말고, 이미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안에 우리의 부르심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길이냐’가 아니라 ‘인도자 하나님’인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시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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