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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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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질서

/ 영성(靈性/Spirituality) /

신대현 목사

사람의 영성
관계
영성과 삶
영성의 실패가 가져온 심판
하나님의 구속의 청사진 속에서 드러난 사람의 영성의 큰 그림
사람의 영성의 완성이며 푯대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삶
겸손
사람의 영성의 완성을 내다보는 청사진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현실적 책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7-28

사람의 영성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며,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다'란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데에 기초한다. 그러나 사람의 '영성(靈性/Spirituality)'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창조 세계를 채우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리시면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됨의 의미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지닌 자이며, 단순히 창조된 자가 아니라 목적을 지닌 존재로 창조된 자이다. 하나님과 사람과 온 세상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분의 명령을 따르면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가운데에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가 사람의 영성의 출발이라면,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 질서를 따라서 만물 안에 다양성을 채우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은 사람의 영성의 현실이며, 책임인 것이다.

관계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 조화는 깨졌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깨졌고, 사람과 세상의 관계가 깨졌으며, 그 결과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도 깨져버렸다. 여기에 덧붙여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마저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사람은 두 모습으로 갈렸다. 한 쪽은 본능을 쫓았고, 다른 한 쪽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했다. 가인은 본능을 좇았고, 아벨은 믿음을 좇았다. 본능을 좇는 자는 죄를 자랑했으며(창 4:23, 24), 다른 한 쪽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길 갈망했다(창 5:25, 26). 한 쪽은 아예 육신이 되어 버린 반면, 다른 한 쪽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표현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있다. 사람의 범죄 이후로 나타나는 영성이 공동체의 모습을 가진다는 점이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때에는 아직 큰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확인되기가 어려웠지만, 그 이후로 나타나는 영성을 보면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하기야 아담과 하와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 때에 사람됨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부터가 사람이 홀로 영성을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긴 하다. 아무튼 영성의 공동체성은 사람의 영적인 본능이다. 사람에게 육적인 본능이 있듯이 영적인 본능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영성은 끊임없이 관계를 요구하며, 그 안에서 표현되고 깊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표현되면 교회를 이루고, 반대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세력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심화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

영성과 삶

이처럼 창조 때에 부여받은 사람의 영성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의 관계라는 ‘관계들’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영성의 내용이다. 현대에는 더욱 그렇다. 개인주의 영향을 받아서 개인의 경건이 사람의 영성과 동일시되고, 신앙의 성숙함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어서인지 사람들은 영성을 정의할 때 좀처럼 세상으로까지 그 범위를 넓히지 못한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의 영성은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삶의 터전을 배제하고는 영성을 정의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범죄 이후로 사람과 세상의 관계에서 나타난 영성의 자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자연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삶을 담고 있는 기본질서를 포함하는 모든 창조 세계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의 실패가 가져온 심판

사람과 질서의 파괴가 보이는 첫 사건은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살해한 것이다. 관계의 파괴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인의 자손인 라멕이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을 찬양한 것은 질서 파괴의 발전된 모습이다(창4:23). 그런데 근본적으로 세상의 질서 형태 자체가 무너져 내린 경우는 창세기 6장 2절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이 구절은 단순한 사실의 설명이 아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사람을 지면에 쓸어버리시게 된 근본 이유이다. 곧 이어 창세기 6장 3절에 나온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는 선언처럼 120년이 되던 때에 홍수가 임했다.

왜 세상이 홍수로 망해야 했는가? 사람과 세상 사이의 영성이 그 이유였다. 창세기 6장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세상의 통치자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세상 통치자들이 육욕에 빠져 사람의 딸들을 자기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취한 것은 세상의 질서 자체가 무너져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한다. 통치 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의 욕정이 통치의 기본 질서가 된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영성을 펼쳐갈 가능성조차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창세기 6장 3절은 영성을 상실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가 기록되어 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홍수 심판이 있고 난 후 새로운 영성이 사람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는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고(8:21), 사람과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생명의 질서가 세워졌으며(9:3),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에는 홍수가 없을 것이 약속되었다(9:10). 크게 보면 희생 제사와 생명의 질서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곧 영성을 상실해 갔다. 바벨탑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전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책임을 져버린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구속의 청사진 속에서 드러난 사람의 영성의 큰 그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새 영성의 회복을 시작하셨다. 한 개인의 영성을 회복하신 것만 아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관계가 본래의 질서로 제자리를 잡는 하나님의 구속의 청사진을 보이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나타난 관계 회복들 가운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명령과 그것을 따르는 인간의 순종으로 세워질 것이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의 축복을 서로 나누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으며, 이 두 관계를 바탕으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살아감을 통해서 사람과 세상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질 것이 암시되었다.

사람의 영성의 완성이며 푯대인 예수 그리스도

이 영성의 큰 그림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한 삶으로 인해서 상실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비쳐진 영성이 내다본 마지막 목표는 구약 이스라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이라는 질서는 자기 역할을 다하고 쇠하여야 할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그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사람의 본분을 회복하신 둘째 사람(고전 15:47), 곧 두 번째 아담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성이 완성된 모습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쫓아갈 푯대가 되어 주신 것이다(빌 3:12-14, 21).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선포는 예수님 사역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정립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부여하신 지상 명령이며, 동시에 창세기 1:28-29에 나온 사람의 본분을 새롭게 표현한 선포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 피조물 된 우리의 본분 곧 우리의 영성을 정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편만하고 세상을 채워서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하는 것, 곧 아담이 창조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영성을 예수님은 새 피조물인 우리에게 다시 선포하신 것이다. 이 영성을 지닌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예수님의 선포에 따른 삶을 살면서, 궁극적으로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

a.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사해 주신 우리 영성을 가지고 과연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이 땅의 삶에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으며,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다. 먼저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하는 일로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란 하나님 나라가 경영되는 배후에 있는 질서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7장 27절까지의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설명해 주셨다. 그 가운데 반복해서 나오는 문구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다(마 5:21, 22). 이는 사람의 옛 관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관점으로 변해야 하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의 선조를 통해서나 문화 안에서 전통적으로 가치와 지혜로 여겨져 왔던 것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한 헌신은 무조건 달려드는 열심이 아니라 관점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한 좋은 예가 마태복음 19장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16, 17, 21).

여기에 나오는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이해 또는 관점의 차이이다. 율법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참 이해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평가하시는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의 참 의미가 암시되어 나온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5).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목소리에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아브라함이 율법 이면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에 헌신한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율법을 겉으로 보는 것은 사람의 관점이다. 반면 율법 안의 가치를 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향해 칼을 쥔 손을 들어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헌신에 따르는 영적인 발견은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이 예비하신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눈으로 본 하나님 나라의 가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이 보여주는 청년의 근심은 '이삭을 드리길 포기한 아브라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없었어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볼 수 있었는데, 이 청년은 율법을 알고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끌어내려는 노력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라면 모든 율법도 ‘여호와 이레’로 인하여 온전해진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는데, 청년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버리지 못한 채 하나님 나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의 출발은 바로 이러한 자아 중심의 관점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나의 죽음이 있는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삶인 것이다.

b. 제자가 되는 것

예수님과 같이 되는 또 다른 출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예수님은 허다한 무리의 좇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에게 제자가 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면서 제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첫째로 제자는 사랑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는 말씀에서 '미워하다'는 말은 '덜 사랑한다'는 헬라어식 표현이다. 예수님은 '미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는 예수님께 사랑을 헌신한 자이다. 그래서 제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의 관계를 소유한다. 결과적으로 제자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넓은 이해를 가지게 되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제자는 인생에 대한 자기 계산과 전략을 내어드려야 한다. 사랑의 우선순위 다음에 나온 건축자(28-30절)와 어느 임금(31, 32절)의 비유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과 헤아림의 결론으로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은 망대를 세우듯 계산으로 그 마지막 완성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계산처럼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적인 계산을 버려야 참된 결론이 보이는 것이 제자 되는 일이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끝까지 제자됨을 지켜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제자는 전략을 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구원의 도전은 사람에게 불가항력적인 도전이다. 하나님의 도전을 이겨낼 인간 세력은 없다. 구원의 도전을 거부하는 것은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과 화친하는 것 밖에는 살아날 길이 없는 것이다.

지혜 없는 자는 제자의 삶을 시작했어도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않은 채 자기 계산을 따라 시작했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생기어 사람들의 조롱을 산다(29, 30절). 또 지혜 없는 자는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은 채 하나님의 도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힘겨운 씨름만을 하며, 결국은 하나님의 것을 이루지 못하는 인생을 살다가 패배한다. 이 두 비유의 결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인생에 대한 자기 계산과 전략을 내어드리며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 그것이 제자의 본분인 것이다.

제자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은 소금에 대한 비유이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14:34, 35). 랍비들은 소금을 지혜의 상징으로 여겼다.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은 곧 지혜를 잃는 것이다.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지식으로 얻을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생각을 깨달을 수 있다(고전 2:11). 제자에겐 이러한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지혜를 잃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잃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생각으로 이끌리는 삶을 살지 못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자는 제자가 아니다. 소금도 맛이 있듯이 제자에게도 맛이 있는데, 제자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제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각’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생각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맛보고’ 그를 제자로 ‘여긴다.’ 제자의 맛을 내지 못하면 맛을 잃고 버려진 소금처럼 사람들의 조롱과 판단에 짓밟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삶

그리스도인이 지혜를 잃어 어리석은 자로 보이지 않으려면 위에서 요구된 제자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반면 제자의 모습을 지켜 가는 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하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이 바라보는 성취를 향해 모든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 그 약속에는 그것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 약속은 반드시 이뤄진다. 하나님은 성취하려고 하지 않으신 것은 아예 의지(意志)하지도 않으신다. 또 그 약속에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실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래서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표현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던 지혜가 바로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를 통해 발견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의 지혜의 무대이다.

겸손

우리는 마지막으로 겸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인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모습은 겸손이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참 겸손이 깃든 모습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현재에 만족하고 미래를 믿음으로 소망하는 것이다. 어떤 뜻인가? 빌립보서 2장 13절이 그 답을 준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종종 이 말씀은 자기의 마음속에 바라는 바를 미래로 투영할 때에 사용된다. 그 이면에는 현실의 불만이나 염려가 숨어 있어나 혹은 현재에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을 기도로 이뤄내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정황에서 이 말을 했는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2:11, 12). '모든 것'은 곧 모든 상황이다. 바울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고백을 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과거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가 불만스럽지 않았다. 현재를 염려스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 분출로서 이 고백을 기도에 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현재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처럼 미래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지난 세월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근거로 현실을 자족함으로써 출발해야 한다. 현실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면 자연히 현재는 불만족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며, 믿음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영성의 완성을 내다보는 청사진

사람의 영성은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 안에서 사람을 구속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셔서 궁극적으로 그 나라에서 완성하실 목표이다. 시편 114편에는 사람의 영성의 완성을 내다보는 청사진이 소개되어 나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유다가 여호와의 성소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가 바르게 세워진 모습이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사람이 가지는 참 모습인 것이다.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터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구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죄가 만연한 세상 가운데서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따라서 세상과 관계를 제대로 세워갈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토가 되는’ 약속이 궁극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현실적 책임

사람의 영성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시작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감으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사람의 참 본분을 하나님 중심으로 회복하고,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려,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시는 대로 삶에서 '하나님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서 하나님이 임재하고 행하여 다니시려는 대로 하나님의 발이 내딛으실 수 있는 모든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미 사람의 참 영성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때, 우리의 삶, 우리의 교회만 아니라 우리가 부딪치는 세상에서의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소가 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토가 되어야 함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영성의 책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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