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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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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질서

/ 확신 /

신대현 목사

회의와 죄의식
의심, 신앙의 여정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나?
내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의 문제를 다루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회의의 형태
구원, 바로 알기
회의를 이기는 길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 디모데후서 1:12


회의와 죄의식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회의를 한 번도 안 해본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이 질문의 대답이 '없다'라면 회의는 그리스도인이 겪는 지극히 정상적인 경험이란 얘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은 회의를 품는 자신의 모습에서 강한 죄의식을 느낀다.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속으로 감추려 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대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가기보다 율법에 메이는 신앙이나 외식하는 모습을 가지기 쉽다.

그러면 회의는 지극히 정상적인 경험이면서도 왜 죄의식을 갖게 할까? 혹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기준 삼아서 처음 믿음을 가진 형제를 그 기준으로 판단하고, 동일한 신앙 수준을 무리하게 요구하기 때문은 아닐까? 또 성경이 회의에 대해서 말하는 바를 한 쪽으로만―부정적으로만―이해하고, 다른 쪽―하나의 신앙 과정으로―이해하는 것은 간과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닐까?

의심, 신앙의 여정

야고보서 1장 6절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은 ‘구원’이란 제목을 다루는 성경공부 교재에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 그래서 처음 믿기 시작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 초기에 이 말씀을 어느 경로를 통해서건 듣게 된다. 그리고 '의심'이란 단어는 그들의 뇌리에 '부정적'인 개념으로 박혀 버린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서도 '의심'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단서들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 21:21; 비교, 막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 24:38). 

그렇다면 '의심'은 정말 한 순간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다른 성경 구절을 살펴보면 '의심'에 대해 위로하는 말씀이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 14:1),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이로 보건대 '의심'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비기독교적 개념이 아니다. 신앙의 초기 여정에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처음 믿은 그리스도인의 의심은 '불신'이 아니라 마치 세상 경험이 없는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때로 자기 머리로 이해되지 않을 때는 확신보다 더 의구심을 가지는 그러한 모습이다. 그리할 때 엄마가 아이의 이해 속에서 대화해 주지 않고 무조건 이해시키려 한다든지 무시해 버린다면 아이는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한 채 다른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짐스러워 하고, 심지어 두려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먼저 믿은 형제들은 절대로 의심하는 자를 정죄해선 안 된다. 그의 의심하는 모습을 긍휼히 여기고, 그 의심을 바르게 다루고 대처해 주어서 더 확신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나? 

형제가 가지는 회의의 문제는 바로 어제의 나의 문제였음을 인식하고 그를 대하여야 한다. 우리는 지나온 과거에 우리도 의심한 경험이 있었던 사실을 새롭게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부분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확신을 잃고 방황했던가? 예수님을 영접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또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의심이 확신이 되도록 인도하셨나? 

내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의 문제를 다루라
저마다 지나온 신앙의 길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처음 믿는 자의 의심의 문제를 다룰 때에 주관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의심'의 유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주관적인 문제 해결책보다는 성경이 말씀하는 사실들을 잘 알아서 어떤 경우든지 '내 얘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연약한 자들을 도울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해 회의가 드는 여러 유형을 살펴보고, 구원을 바르게 정립하며, 회의를 이기는 길을 성경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회의의 형태

a.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나? 구원의 기쁨은 이제 끝인가?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이것은 단번에 주어지는 구원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인해 단번에 주어진 구원은 '여정'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의 자라나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래서 회심한 자는 천국으로 바로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남은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죄악이 흐르는 세상의 물결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의 의로운 삶을 살려는 노력에 맞서 부딪쳐 오는 고난을 당하게 된다. 이 때에 회심의 기쁨은 고통스러운 절망감으로 변한다. 이 상황에서 쉽게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은 나의 이 상황을 알고 계시는가?', '정말 그 분은 나를 살피시고 있는 것일까? 등등이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위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발 더 나아가는 발판이다. 시편 42편은 이 상황을 잘 보여준다. 시편 기자는 절망 중에 하나님을 갈급해 하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사람들의 조롱을 당하면서 자신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보고자 처절한 몸부림을 한다. 결국 그에게 찾아온 것은 이전보다 더 강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었다.

b. 여전히 죄를 짓는 나 같은 것이 무슨 의인인가? 나의 구원은 아직도 멀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구원받아 의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를 짓는다. 죄는 우리의 감정을,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으로 몰고 가며, 우리의 신분을 다시 죄인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할 때 우리는 좌절하며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나 같은 것이 무슨 의인인가?', '나의 구원은 아직도 멀었다' 등의 체념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피조물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의와 죄를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 말이 암시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한 의롭지만 그 본성 안에 죄가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죄인이란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 우리 안에 자신에 대한 체념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그 구원을 이뤄 가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 오히려 주님을 영접했을 때 가졌던 우리의 기쁨이 감정에 따라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흔들릴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론 처음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지를 직접 눈으로 보며 체험하길 원한다. 하지만 사물을 ‘보는’ 방식이 반드시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은 아니다. 우리가 꼭 본다고 해서 그 사물의 존재를 완전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낮에 하늘을 볼 때 파란 하늘은 시야에 들어오지만 별들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마치 낮에 별을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다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지를 전적으로 보는 것에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의지를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성경을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c.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나의 믿음은 진실한 것이었나? 

때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단순히 생각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해 회의에 빠진다. 이는 구원에 대한 의심에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고백한 나의 믿음은 진실한 것이었나?', '주님을 고백한 믿음이 내 믿음이었다면 똑 같은 믿음의 고백이 안 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다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나?', '하나님은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내 삶을 보시고 구원대신 심판을 하지 않으실까?' 등의 생각은 모두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믿음은 결코 대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믿음을 정의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은 이 사실을 잘 드러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이미 마음에 자리 잡은 믿음의 대상이다. 지금 현재 가지지 않고, 눈앞에서 볼 수 없지만 그 대상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생겨나게 된 것은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이신 하나님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믿음은 우리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인 것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우리는 믿음에 대해 의심이 들 때마다 우리의 믿음을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바라보았던 대상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요, 그 분의 약속이 담긴 말씀이다. 내 믿음은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단코 변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8),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비교, 마 5:18). 

d. 왜 구원받은 자에게 고난이 오는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삶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종교를 찾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도 어려움을 이기는 방편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비록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자라도 이러한 세상의 '종교성'의 영향 아래에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할 때 성경적으로 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배경으로 하기 쉽다. 그래서 삶에서 축복대신 고난이 찾아오면 '구원'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에 빠진다, '왜 구원받은 자에게 고난이 오는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난 후에 축복을 받았다는데 나에겐 왜 고난이 따르나?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는 사랑하지 않으시나?'

이때에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하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하지만 이 고난은 단지 겪어야만 할 필연성보다는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진다. 이 고난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는 비밀이 있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그리스도인의 자라남'이 있다(고후 1:5, 7; 벧전 2:21).

고난은 타인에 의해서도 오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징계의 형태로 오기도 한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우리 육체의 아버지…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히 12:5-10). 하나님의 징계는 결코 하나님의 감정이 동기가 되는 법이 없다. 우리의 죄의 성품이 하나님의 징계의 동기가 되며, 우리 눈에는 징계가 당장 고난으로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은 고난을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참여케 하는 특권을 주신다.

이제껏 살펴본 문제들과 그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은 여러 경우에 생기는 회의를 다뤄본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구원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데에서 회의의 싹은 틀 수 있다. 그래서 회의를 극복하는 데에 있어 구원을 바로 알고 자신의 구원을 재점검해 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구원, 바로 알기

요한복음 3장 16절은 구원에 대한 분명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해 회의가 드는 것은 이 말씀 이면에 담겨 있는 더 넓은 차원의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문제보다 그 이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성품에 주목하려 한다.

a.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구원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이지 사람이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딤후 1:9). 우리가 현재 짓는 죄로 인해 구원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태도이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죄인은 사랑을 받기 때문에 매력이 있는 것이지 매력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실로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죄가 커서 구원을 의심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아직 자신의 모습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인 은혜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은 결코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 아무리 부족해도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시며, 그것을 회복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서 임한다(요 3:16). 구원은 처음에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마지막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에겐 전적으로 그 분의 은혜에 의지할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어거스틴은 ‘과거는 하나님의 은총에, 현재는 그의 사랑에, 미래는 그의 예정에 맡기라’고 했다.

b. 우리를 먼저 아신 하나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믿었다면 그 분은 우리가 만들어 낸 신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해하고 믿으려다 실패하는 자들이 많다. 혹은 기독교에 대한 냉소적 태도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괴테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만약 당신이 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신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자를 알 수 있는 지각을 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 5:20). 결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아서 믿게 된 것이 아니다. 더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만나신다는 사실에는 그 분의 존재 자체가 밝혀져 있는 것이다.

c.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은 요한복음 3장 16절만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 오래 전 구약 시대에서부터 말씀해 오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마지막 날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것이다(히 1:2). 그러므로 기독교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우리의 감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심은 이미 역사의 오랜 흐름 가운데 입증된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오직' 믿음만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태도인 것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겐 하나님의 구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는 것이다(고후 1:20).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약속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렇게 말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確信)하노라’(빌 1:6). 
 
회의를 이기는 길

 
a. 회의를 영적 성장의 촉진제로 여기라

회의에 열중하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속만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오히려 회의를 믿음을 자라게 하는 양분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회의는 믿음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지표이다. 회의는 신앙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우리가 붙잡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깨지기 쉬우며, 또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 분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근본적으로 회의는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 마음 밭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씨 뿌리는 비유'(막 4:1-20)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씨앗으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에서 돌밭은 여기저기 돌이 산재해 있는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바위 위에 얇게 흙이 덮인 토양을 말한다. 이것은 말씀이 뿌리를 내릴만한 '이해'가 없는 마음이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좋은 토양으로 바꾸려면 규칙적으로 성경을 배워서 하나님을 아는 일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이 중요하며, 또 성도의 무리와 함께 성경을 배워 가는 일이 중요하다. 성경에 뿌리를 박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시 1편).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는 기운을 막은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문제들은 하나님을 쉽게 우선순위에서 밀어낸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믿음이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삶의 문제가 믿음의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 자체가 믿음의 문제가 삶의 문제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삶에서 결코 밀려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누구도 삶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는데, 삶을 이겨보려고 하나님을 밀어내는 자는 오히려 삶의 지배를 받고 먹혀 버리는 반면, 하나님을 우선에 두는 자는 도리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정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b. 삶이 하나님의 활동무대가 되게 하라

우리는 보통 삶의 계획을 세울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여지를 두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 함께 할 시간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바쁜 사람인 것을 말해준다.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보다 더 바쁘면, 우리가 세상의 경영자인가?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 계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내 삶을 내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곧 성령 충만한 삶, 성령의 행하심이 내 삶을 온전히 채우는 삶이다. 그리할 때에 내 삶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c.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라.
 
회의를 이기는 가장 근본 된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다. 약속은 우리를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게 한다. 회의는 현재에 닻을 내리게 하고 과거로 우리를 잡아당기지만 약속은 미래로 우리를 인도한다. ‘미래 지향’이 약속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만이 회의의 늪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여정을 지속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반드시 우리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케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때를 따라 실상으로 드러날 ‘하나님의 현실’을 이미 그 안에 담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어떤 약속들이 새겨져 있나? 

우리 삶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께서 해 주신 약속은 무엇인가?(요한계시록 3:20; 요한복음 6:37)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신 약속은?(요한복음 5:24; 6:47; 10:28)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는 무엇이 약속되었나?(요한일서 1:9) 인생의 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은 무엇인가?(마태복음 28:20; 히브리서 13:5-6; 야고보서 1:5; 고린도전서 10:13) 기도에 대한 약속은?(요한복음 15:7; 빌립보서 4:6-7) 인생의 싸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여호수아 1:9; 이사야 41:10; 시편 32:8) 

일부러 이 약속들의 내용을 적지 않고, 참고 구절만 적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이 약속들에 대한 궁금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회의는 게으른 자에게 임한다. 말씀을 앞에 놓고도 회의하고 있다면, 십중팔구 그 이유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보다 아예 말씀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기 쉽다. 말씀을 펼치라. 약속을 찾으라. 그 약속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어떤 말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 4:12). 우리의 육과 영의 진실을 드러낸다. 말씀을 펼치는 자에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관하고 계시다는 엄중한 사실이 임한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난다. 결국 그 말씀은 우리를 믿음으로 끌어가며, 회의를 벗어나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경주하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인생의 회의를 이겼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 자신을 예외로 생각하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읽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면, 내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현실을 드러내시고, 나를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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