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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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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질서

/ 가정과 교회 /

신대현 목사

하나님의 나라와 새 가정
굴림 혈통의 가족의 의미
굴림 현대 사회의 가족 문제
굴림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피차 복종
굴림 남편 된 자의 성경적인 자기 발견
굴림 계속되어야 할 작업을 위한 큰 틀의 확립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 에베소서 5:31-32

하나님의 나라와 새 가정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알리셨고, 삶의 비전을 그 나라에 둘 것을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더욱이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로서 새로운 가족을 창조하셨다. 그 가족 구성원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제자들이었다,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1-3).

심지어 예수님은 옛 가족 관계가 새 가족으로 인하여 대적하는 관계로 바뀔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1-22). 혈통의 가족과 대립하는 것이 어디 편한 일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 그것일 것이다. 조금 위안을 받아볼까 하여 예수님을 찾을 때, 예수님의 답은 더 모질기 그지없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

혈통의 가족 관계에 관한한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신 분이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이 일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 안에서는 실제적으로 무섭고 불안한 결과들이 생겨났다. 같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잔멸하려는 움직임이 생겼고(행 8:3),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는 자들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며, 핍박하고, 돌로 치고(행 7:59), 칼로 죽이는 일이(행 12:2) 자행되었다. 이 일이 자기 가족들 안에서도 충분히 일어났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혈통의 가족의 의미

그러면 예수님은 이혼이나 가정의 파괴를 주장하신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혼을 반대하셨고(마 19:3-12), 아이들을 축복하시며 환영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혈통의 가족을 부인하거나 제거하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혈통의 가족의 중심축을 바꾸시려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비교하여 혈통의 가정을 상대적으로 생각하신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혈통의 가족을 구원의 매체로 여겨오던 유대인들의 생각에 도전을 던지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혈통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뭉치고 자라가기를 기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새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두 번째의 출생을 요구한다. 두 번째 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는다(요 3:5). 물과 성령이란 표현은 하나의 정관사로 묶여있는 ‘한 개념’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에스겔 36장 25-27절의 말씀을 요약한 것이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물로 뿌려 정결케 하시고 새 영과 마음을 주어 새롭게 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 안에 성령을 거하게 하시는 작업―하나님의 임재를 예비하시는 작업이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사람을 죄에서 깨끗케 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작업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1장 13절이 말씀하듯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태에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형제들과 자매들이 되며, 이 가족 관계야말로 살아있는 교회의 근본이 된다.

그렇다면 혈통의 가족 관계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혈통의 가족은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가족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의 연합에는 육체로 하나가 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창 2:24).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 6장 4절에 나오는 혈통의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는 이러한 에덴에서의 원리를 본받고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에덴에서의 혈통의 가족이 ‘하나님 안에서의’ 혈통의 가족이었다는 것이다. 에베소서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은 혈통의 가족 질서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은 오직 혈통으로만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반면 하나님의 사람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 중심의 가족 질서를 세우려는 회복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에덴의 아담과 하와 부부는 하나님 중심의 가족의 이상(理想)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의 연합체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돕는 배필이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하나님 나라라는 큰 가정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청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역자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부부는 혈통의 가정을 통해 서로의 믿음을 키워가고 영적으로 훈련되어서 온전한 ‘한 몸’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두 사람의 혈통적 연합은 남자와 여자가 연합된 ‘한 사람’의 사람됨을 완성해 가는 시작이며, 그 둘이 이룬 가정은 그 ‘한 사람’의 삶의 정황의 출발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생산해 내는 태요 영적 훈련장인 것이다.

현대 사회의 가족 문제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생산적인 단위보다는 소비하는 단위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사회는 가족 중심의 체제에서 개인 중심의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한 개인이 공동체의 지체로서 가지는 자아는 점점 잃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는 언약으로서의 결혼도 개인의 취향을 중심으로 계약 결혼 내지 동거라는 형태로 바뀌고 있고, 부모들도 가정에서의 책임보다 개인이라는 자아의 성취 욕구를 위해 뛰어다니는 형편이다. 또한 아이들을 맡아주는 전문단체도 이에 편승하여 늘고 있다.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활동적이고 편리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에서 활발하며, 그 깨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편의 시설을 늘려 놓고 그것을 즐기는 데에서 분주하다. 이에 따라 아이들의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부모의 영적 성장의 매개체나 영적 유산의 기업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부모의 사회 활동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을 맡기보다 사회나 영리 단체가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가족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것인데(신 6:6-7) 현대 사회는 그 흐름을 끊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눈앞에 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남들보다 처지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살겠는가? 아니면 뚜렷한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가정의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하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모습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를 ‘경제적인 잣대’로만 재어 생각하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제라 함은 자본주의 가치관과 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며, 돈은 물론하고 경쟁 속에서의 생존까지도 그 원리 안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야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이유가 되어서 자녀를 영육 간에 전인적으로 키우는 일에 소홀하거나 혹은 경제 논리를 핑계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가족의 모습을 생각조차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잠시의 가치보다 못하게 여기는 태도이며, 돈을 하나님보다 중요시하는 자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대전제를 불신하는 것이며, 영원한 영혼의 소중함을 육체보다 못하게 보는 것이다. 이는 가족의 의미를 혈통과 먹고 사는 일에 묶어 놓은 결과이다.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피차 복종

하나님께서는 혈통의 가족에 대한 기대를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 6장 4절에 표현하셨다. 여기의 중심 주제는 '피차 복종'이다. 그 복종의 정황(情況/Context)은 '주(主) 안에서'이다. 주(主) 안에서라는 정황이 가르쳐주는 바는 가족 간에 어느 누구도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누구를 향해 일방적 요구를 할 수 없고, 모든 구성원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한 쪽의 복종이 더 요구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그것이 더 나은 역할이나 더 힘센 권위에 눌렸기 때문이 아니라, 큰 책임을 수행하는 자를 따라주는 자발적인 순종이 더 필요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실제적으로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가지는 역할은 사회적으로 더 큰 권위와 책임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에게 더 많은 복종을 요구하는 동기가 될 수는 없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라고 말씀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오히려 부모나 남편의 역할은 더 나은 역할이 아니라 더 약한 자의 필요를 채우는 더 큰 책임인 것이다.

더욱이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과 서로의 없는 것을 채우는 섬김의 모습은 가정의 근본임과 동시에 교회의 근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려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가지는 역할과 그 역할에 따른 바른 권위의 사용이나 책임을 배우고, 더 나아가 가정에서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가족인 교회로 자연스럽게 그 태도를 연결시켜가야 하는 것이다.

남편 된 자의 성경적인 자기 발견

여기서 한 가지 부각시켜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남편 된 자의 성경적인 자기 발견이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남자는 결혼으로 인하여 부모를 떠난다. 유교의 전통적 혈통 관계에서 보면 여자가 부모를 떠나 시집을 가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이 틀렸다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가정을 이루는 기초로서 한 남자에게 여자의 머리로서의 권위를 주시기에 어떤 남자도 부모를 떠나지 않고는 한 가정을 이루는 권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결코 시아버지가 여자의 머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남자가 영적으로 여전히 부모의 신앙에 의존하고 있다든지, 물질적으로 부모에게 기대고 있다든지, 정신적으로 부모의 생각에 메어있다면 그것은 독립된 가정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남자가 부모를 떠났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의 한 몸 되는 연합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연합을 억지로 이루기 위해서 남자가 여자에게 명령을 부가하는 권위적 접근을 한다면 가정은 파탄을 맞기 쉽다. '한 육체'(31절)가 되는 것은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할 때에 이뤄진다(28절). 남편은 바로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적인 권위와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남편의 권위와 책임은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 아니고는 결코 온전하게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깨지고 있는가? 왜 그런가? 모양으로는 한 육체로 보일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한 육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편 된 자들은 한 육체가 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남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세심히 주목해야 한다. 남편 된 자들은 아내를 자기 몸같이 먼저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의 두 번째 큰 계명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 계명과 남편의 아내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반문할 남편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하고 관용하면서 아내에게는 경직된 고자세를 보이는 남편은 한 육체를 이루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큰 계명을 자기 권위와 명령과 판단 아래 두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가정의 불화는 영적인 가정의 질서가 남편 된 자들의 확실한 자기 발견과 그에 따른 아내 사랑에 있다는 것을 남편 된 자들이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도 결국 가정의 이러한 질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남편 된 자들이 영적으로 깨어나야 하고, 남편 된 자들이 영적인 리더로 세워져야 하는 것은 교회의 터를 닦는 데에 있어 필연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적 은사와 직분을 업신여긴다는 얘기가 아니다. 누구라도 어느 사람에게서 성령의 은사의 나타남을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마다 남편 된 자들이 아내의 영적인 머리로 세워져야 하고, 이것이 확대되어 교회의 질서가 확립돼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라는 정황에서 교회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에 따라서 자녀 문제도 올바르게 세워질 수 있다. 교회는 부모가 없거나 부모와의 불화를 겪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영적으로 이끌어 줄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는 역할을 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영적 질서가 깨어져 있는 가정들이 산재한 교회에서 어찌 이런 역할 감당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이러할진대 가정의 영적 질서에 기초한 교회의 질서 확립은 그 어느 다른 것보다 중요한 사안이며, 이것은 다음 세대로 교회가 이어지느냐 못하느냐는 사활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계속되어야 할 작업을 위한 큰 틀의 확립

각론으로 들어가면 더 구체적인 현안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가정과 교회를 연결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직간접적 메시지를 여러 성경 말씀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적인 큰 틀이 우리 안에 세워져야만 그 작업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 큰 틀인가? 그것은 각 성도들이 위에서 언급된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 6장 4절의 말씀에 비추어 자기 자신과 가정을 다시 돌아보고, ‘주(主)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큰 정황으로 자기 자신과 모든 가정의 문제를 가져오는 일이다. 더불어서 가정의 담을 혈육에 제한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가정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어느 그리스도인이라도 이 두 가지가 선행돼야만 자신의 믿음이 진정 혈육을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전이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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