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


교회의 질서

/ 유아세례 /

신대현 목사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언약과 유아세례: 표징과 그 안에 감추어진 약속
할례와 유아세례
언약과 유아세례
그리스도와 유아들
유아들의 구원
나오는 말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 마태복음 19:14

들어가는 말

유아세례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자료로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보다 더 잘 설명된 곳은 없을 것이다(참조, 기독교강요에서 유아세례를 다룬 부분, IV.16). 특히 칼빈은 언약적 관점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 본 논술에서는 칼빈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유아세례와 언약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언약과 유아세례: 표징과 그 안에 감추어진 약속

칼빈은 “표징(標徵:sign)의 올바른 이해는 그 외형적인 의식(儀式)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혹, 약속)과 영적 신비로움(혹, 내적 신비)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의식(儀式)으로써 나타내고자 명령하셨다”(IV.16.2)고 말한다. 따라서 외형적인 것에만 착념하는 사람은 세례의 성격은 물론하고 그 효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물을 사용하는 것조차 그 의미파악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의미 없는 표징들을 사용하여 이끌어 오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웃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표징을 그 표징으로 끝내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나타내 주실 것에 대해서 그들이 반드시 참여자가 되도록 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 약속하시고 감추어두신 신비들’을 자기 백성이 누리도록 만드신다는 말이다. 문제는, 유아세례라는 표징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신 ‘언약(혹, 약속)과 영적 신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당한 답변을 하기 위해서 칼빈은 할례의식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먼저 이끌어 오며, 외형적 표징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할례와 유아세례는 근본적인 내용에서 동일함을 입증한다.

할례와 유아세례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그의 후손 사이의 ‘언약의 표징’으로 주어졌다(창17:11).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여주신 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이다. 이 말씀에는 영생의 약속이 포함되어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셨기 때문이다(눅 20:38; 마 22:32). ‘할례의 언약’ 밖에서는 하나님도 그리스도(=구원자)도 약속의 언약들도 세상의 소망도 없는 죽은 자의 세상이다(엡 2:12). 할례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그 언약’의 표징이었고, 그 언약 관계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의 죄를 사하심으로 가질 수 있었다.

또한 하나님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칼빈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할례의식이 ‘단회적인 언약의 표징’인 동시에 ‘계속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행해야 하는 언약의 이행’까지를 포함한다고 본다. 그가 이렇게 얘기한 데에는 할례 안에 ‘죽임(Mortification)’의 개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참조, 죽임(Mortification)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두 번 나오며, 네크로오(νεκροω, 골 3:5)는 죽인 결과(=시체를 만드는 것)를, 타나토오(θανατοω, 롬 8:13)는 죽이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칼빈은 이 두 개념을 할례에 적용한 듯 하다). 

모세는 할례가 ‘죽임(혹, 중생)의 표징’이 되는 사실을 더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이는 육신에 행하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해 준 것으로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할례를 얻으려고 애써서는 안 되며, 애쓸 수도 없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육체적으로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오직 옛 자아를 베어내고(=죽이고) 새 사람이 되는 것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는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행해주셔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서 마음의 할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기”(신 10:15)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열조들에게 할례를 통하여 주어진 영적인 약속들을 세례의 표징을 통해서 가지고 있다. 할례가 그들에게 ‘죄사함과 육신의 죽임’을 상징해 주었듯이,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죄사함과 육신의 죽임’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칼빈은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를 다음과 같이 요약 기술한다, “성경이 선포하는바 세례는 첫째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얻은 ‘우리의 죄 씻음(the cleansing of our sins)’을 가리키며, 그 다음은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은 ‘우리 육신의 죽임(the mortification of our flesh)’을 가리키고, 이를 통해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IV.16.2).

위의 사실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할례와 세례 안에 주어진 약속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죄 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다. 외형적인 의식(儀式)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할례에 속한 모든 것이 또한 세례에도 적용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는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처음 입장(入場)이었다. 그들은 할례의 표징을 통하여 하나님 집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확신했고,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겠다는 고백을 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으로 여겨지며, 그분께 충성을 서약한다.

언약과 유아세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후 즉시 유아들에게 외형적인 의식(儀式) 곧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 언약이 인(印)쳐지길 명하셨다,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 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창 17:12). 그리스도도 스스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써 조상들에게 주신 그 약속을 견고케 하셨다(롬15:8).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 동일한 언약을 그들의 아이들에게 표명하고 인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 언약은 동일하며, 그것을 확증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단지 확증하는 방법만이 다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였던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세례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와 유아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은혜를 제한하기보다 넓히러 오셨다는 것을 사람들로 알게 하시려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을 사랑스러이 안으셨다. 그러시면서 유아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이유는 제자들이 천국을 소유한 자들을 쫓아내었기 때문이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 유아들이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이 정당한 것이면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친교의 표징인 세례로 그들을 인도함이 또한 정당하다. 천국이 그들에게 속한 것이면 그들이 교회로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표징으로서 세례가 부인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세례를 통해 교회에 받아들여지고 마땅히 천국을 소유할 후사로서 여겨져야 한다.

유아들의 구원

“중생을 위한 적절한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 유아들은 아담의 자손들이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칼빈은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만약 그들이 아담의 자손들이면 죽음에 처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롬 5:12이하). 반면 그리스도께서 유아들을 데려 오라 하실 때에(마 19:14) 그들은 생명의 자녀들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이들처럼 유아들을 추방하여 죽음에 몰아넣지 않으시고 유아들을 이끄셔서 자기와 함께 하게 하셨다”(IV.16.17).

선악간의 분별을 할 수 있는 이해가 없는 유아들이 어떻게 중생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세례요한의 예를 제시하시면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신다. 하나님은 요한을 그의 어미의 태에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며 그를 깨끗이 하셨다(눅 1:15).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유아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 주는 예이다.

“유아들에겐 회개와 믿음의 능력이 없다”는 자들에게 칼빈은 또한 이렇게 답변한다, “하나님께서 할례를 통해서 유아들과 교통하셨듯이 지금 유아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참여자가 된다… 유아들은 미래의 회개와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들 안에 믿음과 회개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씨앗이 성령의 비밀스러운 사역에 의해 그들 안에 감추어져 있다”(IV.16.20). 여기서 칼빈이 반박하는 바는 표징에 앞서 어떤 것들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의 주장이다. 칼빈은 그런 자들에게 “어떤 것이 표징에 앞서 선행되어야만 한다면 아마 유아들은 결코 할례를 받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IV.16.21)라고 단적으로 논박한다. 

하나님께서 유아들에게서 은혜의 소망을 끊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것을 확증하셨다면 우리가 그것을 나타내는 표징을 없앨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예를 든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믿음 후에 의식(儀式)이 따랐고, 이삭은 모든 이해에 앞서 의식(儀式)이 행하여졌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전에 언약에 대하여 외인들이었기 때문에 언약 공동체로 들어 갈 수 있게 하는 믿음과 회개가 선행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세례의 표식이 주어질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출생한 유아들은 언약의 기업 안으로(into the inheritance of the covenant) 직접 태어났고, 하나님에 의해 낳아진 자들이기 때문에 세례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나오는 말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통해서 교회를 깨끗케 하신다고 할 때 그가 유아들에게 세례를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유아들도 ‘교회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며(IV.16.22), 천국을 소유할 자들로 불렸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부여하신 언약은 영원하시며, 외형의 변화는 있지만 그 언약을 나타내는 표징은 항상 우리 곁에 있도록 해 주시기 때문이다. 

누구도 단순히 유아세례를 외형적인 형태라고 반박해서는 안 되며, 유아들을 인지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원에 동참할 수 없는 자들로 여겨서도 안 된다. 심지어 성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가 없으면 어찌 구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언약에는 나이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유아세례는 후대교회의 의식에 의해서 생겨난 부산물이 아니라 사도시대로부터 유래된 것을 역사는 증명해주고 있다(참조, 이에 대한 역사적 증거로서 칼빈은 IV.16.8n.에서 세 자료를 소개한다: Irenaeus, Adversus haereses II. xxii. 4; Origen, Commentary on Romans V. ix; and Cyprian, Letters lxiv. 6). 이로 보건대 우리는 성경이 주장하는 의식(儀式)들을 잘못된 교회사를 물려받아 ‘형식(形式)’으로 타락시키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며, 그 의식들을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 속에서 보존해 가는 임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 OTNTFILE 신구약성경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