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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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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질서

/ 투자 /

신대현 목사

투자가 지니는 4가지 가정 또는 원리는 이렇다: (1) 자산을 들여야 한다; (2) 들인 자산은 이익이 남아야 한다; (3) 당장 보다는 미래의 안목을 가진다; (4) 관리 손실 또는 실패의 위험이 있다.

다른 항목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네 번째 항목은 왠지 모험을 해야하는 불안감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 성경의 원리를 따르면 설령 손실이나 실패가 생긴다고 해도 그것은 수익을 향한 과정일 뿐이며, 미래의 안목에서는 결국 수익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경의 원리를 따르면 투자에 대한 실패는 없다는 것인가. 사실인가. 그러면 성경의 원리는 무엇인가? 

 

성경은 '하늘'에 투자하는 것을 원리로 내세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19-21)

하지만 땅에 투자하지 않고 하늘에 투자했는데 어떻게 투자의 수익 보증이 가능하단 것인가. 위의 말씀은 언제나 종교적이 되라는 말인가. 신앙을 앞세우면 땅의 수익은 따라온다는 말인가. 어떻게 신앙만 가지고 투자를 하고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하늘에 투자하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늘에 투자하는 것에는 두 가지의 투자 원리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매일의 삶, 일 그리고 단순한 허드렛일을 통해서도 투자해야 한다.

매일의 삶에 대한 투자가 없는 사람은 영원한 수익을 잃는다. 이는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그를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상 생활의 가치들을 볼 수 있는 투자자의 눈을 가져야 한다. 이 사실은 다음의 말씀에서 확인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34-36).

예수님의 이 말씀은 「행함」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일에까지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충성하는 삶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위의 경우와 반대되는 말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태복음 25:44-45)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일상 생활의 일에서 투자 가치를 찾지 못하는가?

그것은 먼저 내가 가진 것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는 인식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투자가이시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마태복음 25:19).
하나님은 인생에게 그냥 되는 대로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반드시 우리 인생의 진로에 어떤 계기가 되든지 기초가 된다.

그래서 일상 생활에서 부르심을 찾지 못하는 자는 인생의 투기꾼이 된다.

요즈음 신문 지상에는 주식 투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잦다. 조선일보, 1999년 12월 14일자 사회면에는 「너도나도 '한탕 꿈'... 대학생까지 학교서 투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주부나 대학생이나 자기의 일터에서 해야 할 본분은 잃어버리고 너도나도 동일하게 주식을 통해 크게 한탕 해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이것은 단순히 남의 얘기가 아니다. 일상 생활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누구나 이러한 생각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 투자 가치를 찾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니고 있는 달란트의 사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는 사용할 때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이야기 속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에 그것을 묻어 두는 것이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태복음 25:24-25).

이 사람의 잘못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점의 결과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담에게 인간의 본분을 주실 때에 그는 땅에 묻어버릴 달란트를 주신 것이 아니라 다 써버려야 할 달란트를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달란트를 투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는 곧 글 서두에서 언급한 제 1 투자 원리이다: 투자 원리 1: 자산을 들여야 한다.

투자하는 자를 성경적인 용어로 바꾸면 「청지기」이다. 우리는 우리 일상 생활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청지기는 투기꾼이 아니라 올바른 투자자이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잠 13:11)

열심을 내어 사는 생활과 연결되지 않은 재테크는 도박과 같다. 투기인지 투자인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그러나 투기를 투자로 생각하는 위험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의 성과는 양에 있지 않고, 충성됨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 2 투자 원리를 끌어 낼 수 있다. 곧 주어진 달란트에 충성하는 자는 수익을 낸다: 투자 원리 2: 들인 자산은 이익이 남아야 한다.

이 첫 번째 그리스도인의 투자 원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투자 원리를 이끌어 낸다. 곧 일상 생활의 청지기임을 깨달은 자는 일상 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투자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특별히 가난한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전제가 있다. 그것은 자선 사업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적십자사 창립자인 앙리 뒤낭(1828-1910)이 1901년 제 1회 노벨 평화상을 받고, 그 정신을 이어 받아 1971년에 창립된 후 전 세계의 분쟁 현장에 긴급의료 구호 활동을 펴옴으로써 20세기 마지막 노벨 평화상을 받은 '국경 없는 의사회'가 구원의 길까지 보여준 것은 아니다.

어떤 신문 기자는 이렇게 썼다: "박애의 실천자들 뒤에 대부분 종교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인류에게 여전히 종교가 필요한 이유의 하나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도 자선 베푸는 일 때문에 필요한가. 기독교의 표현은 고작 자선인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었나.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이다. 자선은 구원의 표현이지 구원의 전제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표현에서마저도 인색하다. 혹 그런 자들 중에는 고린도전서 3장과 같은 말씀을 읽고 도전을 받아 돈 몇 푼 던져줄 자도 있을지 모른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린도전서 3:12-15).

금, 은, 보석, 나무, 풀 그리고 짚으로 대변되는 공적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우리의 자선의 결과인가. 천국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자선에 따라 그 대가를 달리 받는가. 분명 여기서의 말씀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다. 과연 어떤 집을 짓는다는 말인가.

고린도전서 3:16-17에는 그 답이 나와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집은 하나님의 나라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그리고 짚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의 정도 차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가난한 사람에게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발견한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투자 동기는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동정심 때문이 아니다. 자선을 위한 자선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근본 이유는 우리가 성전을 지어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반적인 제 3 투자 원리가 적용된다: 투자 원리 3: 당장 보다는 미래의 안목을 가진다.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투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서지 못하면 나도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0-22).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태복음 7:24-25에서 집을 짓는 말씀을 하실 때에 그것은 개인 플레이를 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태복음 7:24-25).

예수님이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을 도전하신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을 도전하신 것이다. 이는 공동체 플레이다. 부자는 가난한 자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 이 말은 부자는 돈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부자도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구원을 받는 다는 말이다.

공동체 플레이의 가장 좋은 예는 누가복음 16:1-13에 나오는 옳지 않는 청지기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쟁점은 「재물을 어떻게 쓰느냐」이다. 곧 9절에 나오듯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 말씀의 쟁점이다.

청지기가 옳지 못했던 때는 언제였는가. 그것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할 때였다(1절). 그가 칭찬을 받는 때는 언제였는가. 주인의 재물을 나눠주었을 때였다(5-7절). 재물을 가지고 개인 플레이 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플레이를 했을 때 그 청지기는 지혜로운 자로 칭찬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코멘트를 하신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누가복음 16:8).

어떤 뜻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세워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재물을 놓고 개인 플레이를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 불의한 청지기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못한 일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누가복음 16:9).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곧 나에게 돌아올 물질적인 보상은 기대할 수 없지만 서로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주면서 관계로 연결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개개의 사람들을 세워주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는 말은 우리가 돕는 일이 단순히 자선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연결되는 것을 뜻하며, 결국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는 개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허다한 친구들로 둘러 싸여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만 국한되는가. 요한계시록 21:24는 이렇게 말씀한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게 될 친구들은 만국 백성들이다. 비록 이 땅에서는 누가 그러한 영광을 가지게 될 지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결국 공동체 플레이 가운데서 우리는 무수한 하나님 백성들을 친구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빛의 아들들이 가져야 할 지혜다.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자들은 「우리가 친구로 삼은 그들」이다.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개인의 영광이 아니다. 다니엘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다니엘 12:3).
우리의 빛날 영광은 친구들로 말미암아 비춰질 영광이다.

그러면 누가 가난한 자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내가 베푼 것을 나에게 되돌려 줄 수 없는 자들이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투자 가치가 없는 자들이지만 영원한 나라에서는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보상을 해줄 자들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언 19:17).

여기에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물질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그리고 사역자와 선교사가 포함된다. 또한 우리 땅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과 열방 가운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포함된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지키게 하라」는 말은 곧 공동체 플레이를 하게 하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투자 계획을 세울 때 위의 두 가지 원리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1. 일상 생활의 청지기로서의 삶; 2.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삶.

다음의 구절은 이 두 원리를 잘 요약하여 보여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 6: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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