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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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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질서

/ 돈 /

신대현 목사

...임씨는 실직 3개월 후 큰 아이가 전문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을 못내 진학을 포기했을 때 자신이 직면한 위기의 실체를 절감했다. 『딸아이가 등록 마감날 「아빠, 적성이 안 맞아서 안 갈래요」라고 해요. 딸을 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아이들만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학에 보내겠다고 수없이 마음먹은 그였지만, 현실은 허용하지 않았다. 『여섯 식구가 월 50만원으로 생활하려고 하니 끊어야 할 게 많더군요. 우선 아이들 학원부터 끊었어요.』[1999/12/16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올해 3분기 상위 20%로 분류된 계층의 월평균 소득 437만9900원은 하위 20% 계층의 82만8400원에 비해 5.3배였다. 외환위기 직전인 4.49배보다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진 수치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중산층의 점유율이 70%에서 최근 43.6%로 떨어졌다. 고소득과 저소득 계층의 양극화된 사회로 가고 있는 징조다. 한국사회는 두 동강 날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1999/12/17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위의 두 기사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임씨와 같은 사람에게 돈은 그렇게 중요치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두 번째 기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돈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돈 있는 자들과 자신이 괴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피력하려고 들 것이다. 벌어진 사회 계층차이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돈 많은 자들에 대한 질시(疾視)의 태도는 곧 돈에 대한 부정적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런 상황들에 대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아래의 문제들을 토론해 보자.   

 

1. 하나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돈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과 멀어 지는 길이고 우상 숭배다. 청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다.
2. 사회 현상, 특별히 돈과 관련된 문제는 영적으로 이겨내야 한다. 사회 문제를 돈으로 후원하고 해결하려는 것은 비신앙 단체들이나 하는 일이다.
3. 돈에 대한 정당한 입장을 취하거나 권리를 내세우기보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태도이다.
4.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에 돈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은 불신의 태도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필요마다 기도하면 된다. 

 

 

시대에 따라 돈에 대해 가지는 생각에는 차이가 있다. 고대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가 다르고, 예수님의 시대와 오늘날의 시대가 다르다. 아브라함 때에는 거부(巨富)가 되는 것이 사회적인 괴리현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장려 사항이었다. 이동하는 유목생활에서 힘을 키우지 못하는 것은 곧 약탈을 쉽게 당할 수 있는 여지를 그 만큼 많이 가지는 것과 같았다. 부유함은 함께 하는 공동체(유목민 사회)에 유익과 안전을 가져다 주었다.

반면 예수님 당시의 거부는 서민들을 착취하지 않고는 될 수 없었다. 절대 다수가 빈민의 생활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돈을 버는 것은 곧 다른 이의 손실을 의미했다. (공회원이었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도덕적으로 파렴치하지 않고 거부가 되는 것은 꿈꿀 수 없었다. 그 당시 세리들이 백성들의 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사회의 구조는 변화를 겪었다. 산업 혁명으로 시작한 변혁에 힘입어 절대 빈민층이 중산층으로 이동하면서 부는 더 이상 소수 특권층의 점유물이 될 수 없었다. 서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해주고 그 정직한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었으며, 그들의 이익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었다. 가난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가난을 벗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다면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상황에서 하셨던 말씀과 어떻게 다를까? 아브라함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부를 통해 약자들이 보호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된 우리의 현실을 향해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처럼 거부가 되길 원하시진 않을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돈을 많이 가지느냐 적게 가지느냐의 문제는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절대 불변'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돈을 멀리한 나머지 금욕의 생활을 미덕으로 여기기까지 한 자들이 있었으며, 세속을 떠나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은둔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여길 사람은 드물다.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고서도 돈을 많이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어느 정도가 많은 돈이고 어느 정도가 적은 돈이냐 하는 돈의 기준을 세워서 그 기준에 맞게 살려 하는 것은 돈에 대한 지극히 원초적인 반응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기준(Standards of life)이 아니라 삶의 양식(Lifestyle)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돈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삶의 기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아담에게 무한한 소유의 가능성을 안겨주신 하나님은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소유의 많고 적음의 여부를 가지고 새롭게 삶의 잣대를 세우실 분이 아니다. 오히려 소유의 기준을 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첫 아담이 가졌던 그 정도의 소유를 회복하길 원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그 당시의 부유한 사람들을 질타하신 이유는 그들의 삶의 양식에 있었다. 돈의 문제를 부각시킨 것은 돈이 영적인 것과 정 반대의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의 양식의 핵심이었던 돈이 바로 영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에 대해 부정적인 가르침을 하신 것은 그 결과 사람들이 돈을 회피하고 세속과 분리된 '영적인' 삶을 살게 하실 의도에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진정한 문제를 직시하고 그 삶을 대처할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지게 해주려 함이었다. 돈 문제를 회피하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마 19:22). 오히려 예수님은 돈 문제를 생각하도록 도전하시는 분이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막 6:37). 돈의 문제를 바르게 다룰 줄 아는 자만이 예수님의 구원을 맛볼 수 있었다. 세리 삭개오는 그 대표적인 예다(눅 19:1-10).

재물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이 이 시대의 아들들보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예수님은 책망하셨다(눅 16:8).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재물을 다루는 삶의 양식이 지혜로워야 한다.

예수님은 재물을 버리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다(눅 16:9). 이는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분명히 예수님은 삶의 양식을 도전하신 것이지 재물의 회피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서도 돈 문제와 영적인 문제를 이원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사회 문제를 돈으로 후원하고 해결하려는 것은 비신앙인 단체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치부(置簿)해 버릴 수 없다. 어떤 이는 [경제적인 생활은 영적 생활의 화신(化身; Incarnation)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돈과 영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돈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생활 양식은 곧 우리의 영성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돈과 관련된 문제는 영적으로 이겨야 한다는 말은 이미 그 표현 안에 이원론적인 자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돈과 관련된 문제는 우리의 영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돈과 조화를 이룬 영성을 소유할 수 있을까?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돈 문제에 관한 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영성을 지켜가려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돈 문제에 관한 한 자기 의견을 내놓아서는 안 되는 것인가? 아니, 안 된다기보다 그러한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능동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돈 문제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이기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을 제시한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지키는 일에 유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은 여기에서 나온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11-14).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자에게서만이 하나님의 목적과 성품에 부합하고 지속되는 삶의 양식이 나올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없는 자들을 향한 삶의 양식이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암 6:4-6) 아모스의 외침은 상아 상이나 비파에 맞춘 노래나 포도주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려운 자를 향해 긍휼이 식어 있는 태도를 질책한 것이었다. 동일한 땅 위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어려운 형제에게 아무런 느낌을 갖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러한 자들을 돕는 절대적인 수단이 돈인 현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으면서 돈을 터부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과연 무엇을 위한 제스처인가? 자기 경건의 제스처인가?

우리의 사랑의 표현은 언제나 마음 만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마음은 오늘의 열정을 한 달 후에도 그렇게 지속적으로 표현해 낼만큼 뜨거운가? 우리의 사랑은 돈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줄 만큼 사람들을 만족하게 할 힘이 있나? 오히려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이 아닌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랑이 모자라서 물질로 대신 보상하려 한 것인가?(행 2:44-46; 4:32-35). 만약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오'라면 그리스도인은 돈을 터부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유하게 될 모습을 막연히 생각하면서 괜한 염려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되어져 갈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상을 상상하면서 현실에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을 풍성히 나눠주어서 그들의 주름이 조금 혹은 한 순간 펴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뭐 그리 걱정되고 염려스럽기에 세상 사람들도 한 번쯤 생각하고 행하는 가난한 자 구제를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어렵게 작정해야 할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되어서 불행을 겪는 자들을 돕는 일을 한다는데 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재물을 더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 이유가 단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재물이 보여준 부정적인 모습에 교회가 수 백년 동안을 움츠려 오면서 돈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 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돈에 대해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보다 더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개인의 향락과 만족을 위해 돈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돈의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 주장은 우리의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주장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돈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 주장이 없었던들 지난 한 달간의 쌀과 반찬은 무슨 돈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입히시는 구체적인 표현이 돈을 통해서라고 말한다면 영적으로 안 들리는가? 사람을 통해서라고 말한다면 영적으로 들릴 만 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사람의 돈을 통해서가 아닌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에 돈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은 불신의 태도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필요마다 기도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4-25)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돈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필요할 때마다 구하라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목숨과 몸'을 생각하는 자는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곧 우리 생명의 주관자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이 생명을 지키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왜 주시지 않겠는가? 이런 면에서 생명 없는 재물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할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자산에 대한 분석과 미래에 대한'예산'을 얼마든지 사려 깊게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오히려 예산이 있기에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그 분께 기도하며 그 분의 공급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 사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 사이에서이다. 돈에 대한 염려가 세상의 염려 곧 성공여부의 문제라면 오늘 괴로움으로 족하다. 왜냐하면 재물은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분석과 예산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만 가치를 발휘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우리의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개인의 생활이나 가정의 살림에 대한 분석과 예산이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을 향해 방향이 맞춰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생활에서 반드시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에 눈을 뜨고 계시듯이 우리는 우리 이웃의 상황에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1, 2) 이렇듯 없어서도 베풀 수 있었다면 있는 가운데서는 더 풍성하게 베풀 수 있지 않겠는가? 있으면 오히려 더 못할 것이라는 염려는 오히려 물질에 대한 염려이기보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염려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의 문제를 되짚어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사는 자들이 아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자들 가운데는 이상 사회를 만들려는 야망에 찬 자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는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외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묵상하고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의 형편을 진실 되게 바라보는 자라면 결코 그러한 허황한 이상을 이루기 위해 돈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내세우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양 시대를 사는 자들이다. 곧 이 땅의 시대와 하나님의 임할 시대 사이를 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이 땅 위에 구현하고자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할 시대의 삶의 양식이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완성은 결코 이 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겐 좌절이 없고 오직 최선의 삶의 양식이 있을 뿐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결론적으로 우리는 소모하기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라 생산하며 사는 자들이다. 돈이 우리 손에 들어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들을 생산해 낸다면 그것은 잠시의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낳는 것과 같다. 이런 면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삶의 양식은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기초석이다. 막연히 돈을 터부시하거나 돈을 수단으로 하는 일을 멀리하려 하기 전에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권리는 곧 하나님의 권리인 것을 생각해야 한다.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의 손에 돌려 드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물질의 소유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을 다스리는 삶의 양식을 지닌 청지기 정신과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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