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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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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의 시작

/ 지혜 /

신대현 목사

지혜는 지식인가?
지혜와 여호와 경외
여호와 경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지혜의 우선 원리인 여호와 경외
두려움의 대상을 바꾸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순간 시작되는 지혜
그리스도, 하나님의 지혜
인격이신 지혜
창조자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지혜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 이사야 8:12-14a

들어가는 말: 지혜는 지식인가?

잠언은 아비가 아들에게 주는 인생 회고록과도 같은 책이다. 그 서두에 등장하는 아비는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누구였나? 그는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였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왕상 3:12).

솔로몬과 지혜를 연결시킬 때, 우리는 지능적인 역량을 생각하기 쉽다. 지적으로는 뇌의 사고력을 생각할 수 있고, 영적으로는 분별력을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지혜를 기록한 열왕기상 4장 32-33절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듯하다,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야고보서 1장 5절을 읽으면 지혜는 더욱 우리의 지적인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와 여호와 경외

지혜가 우리의 생각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떠한 생각이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일까? 지혜를 담은 생각이란 ‘생각’에만 제한되어 있을까? 그 지혜로운 솔로몬이 내리는 지혜에 대한 결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이다. 무슨 뜻인가? 지혜를 말하다말고 왜 ‘경외(敬畏/fear)’라는 이상한 말을 하는가? 지혜는 생각의 차원인 것 같은데, 왜 종교적 태도의 뉘앙스를 가지는 ‘경외’라는 말을 하는가? 솔로몬은 전혀 엉뚱한 두 개념을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인가? 

솔로몬의 생각을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지혜’와 ‘경외’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잠언 2장 5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의 궁극적인 보상이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식으로 시작해야 소유할 줄 알았던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잠언 2장 1-4절에서 지혜를 가지라는 간곡한 요청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들을 때, 어느새 똑똑해 지고 싶다는 욕구가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튼다. 잠언을 읽어서 하나님의 지혜를 내 ‘생각’ 안에 소유하고픈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정작 이 간청의 결론을 말하고 있는 5절을 읽게 되면, 지혜가 ‘지적 소유’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란 생각이 든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5절).

여호와 경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처럼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서 여호와를 아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는 이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 많은 잠언을 기록했다. 동기가 이러하다면 잠언은 지식의 양을 넓혀주려 한 것이기 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에 ‘행함’이라는 옷을 입혀주고, 지혜롭게 행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충만할 수 있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쓰여 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가르쳐 주는바 ‘여호와를 아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연결될 때 얻어지는 열매이며, 면류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을 통해 비난받을 때 지적당한 바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그들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져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여기서 우리는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해야만 지혜를 시작할 수 있나?’ ‘무엇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인가?’

지혜의 우선 원리인 여호와 경외

지혜를 갈망하는 욕구는 죄를 짓기 이전부터 인간이 지니고 있던 본능이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그러나 인간은 그 지혜의 욕구를 채우기도 전에 하나님에게서 쫓겨났고, 자기 인생의 방향조차 알지 못하는 자가 되어 버렸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을 선택했지만(창 3,6), 지혜의 최우선 원리인 ‘여호와 경외’를 경멸함으로써 타락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와 대조되는 모습을 창세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에게서 본다, “삼일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창 42:18). 이후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을 통해 애굽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이 일로써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아담이 여호와 경외하기를 잃어 버려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대신 땅에 바벨탑을 세우는 비극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온’ 요셉을 사용하시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나라를 ‘본격적으로’ 세워가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려움의 대상을 바꾸라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말을 문자대로 풀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다’이다. 이 의미로 보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사야 8장 11-13절은 이에 대해 잘 말해준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맹약(盟約)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위의 구절들에 따르면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뜻은 두려움의 대상을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 지혜는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을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두려움의 대상을 바꾸는 데서부터 우리에겐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이 지혜가 ‘삶에서’ 확인된다. 신명기 4장 3-7절은 역사가 보여주는 증거이다.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두려움의 대상을 바알브올로 삼았던 자들은 다 멸망하였으나,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은 자들은 다 생존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야 할 자들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열국 백성들은 그들이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라고 감탄할 것이었다.

죄 지은 인간에게 두려움은 본질적인 모습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두려워한 것처럼 죄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죄의 삯으로 가져다주었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인간! 두려움을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일진대, 인간은 그 운명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좌절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바꾸는 것이다.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없다면, 적어도 대상은 바꿀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순간 시작되는 지혜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그 원인의 대부분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우리에겐 지혜가 시작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을 보며, 하나님의 의지를 보며, 하나님의 계획을 본다. 다니엘은 지혜자가 가지는 특권을 말해 준다. 그는 인간에게 정해진 길이 ‘하나님의 지혜의 청사진’ 안에 있는데, 지혜자만 그 길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단 2,20, 21; 12,10),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2,20-21; 12,10).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지식’이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지혜

그리스도인이 된 자가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때는 언제인가?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한 순간이다.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순간이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이 땅의 모든 지혜를 완성하신 분이시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오셔서 지혜자의 가르침을 베푸셨고, 비유로써 잠언의 궁극적인 완성을 이루셨다,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5).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 안에는 지혜의 샘이 터진다(골 3:16). 지혜의 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혜의 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되기 때문이다(고후 1:20). 그리스도는 우리로 영원한 지혜자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 안에 당신의 가르침이 솟아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을 두셨다(요 14:17, 26). 그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르치신다. 이로 보건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출발한 지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열매 맺으며, 그것은 지식으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인격이신 지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다른 말로하면 ‘지혜’가 그리스도시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하려 할 때, 생각 속에 지식으로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 잠언 8장 22-31절로 눈을 돌려보자,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지혜는 창조자로 소개된다. 지혜는 우리 생각에 담을 지식이 아니라 우리와 교제를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내주해 계신 그리스도가 지혜이시다. ‘지혜’가 부족하여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임재와 통치를 충만하게 하시어, 우리로 그분이 가르치시는 생각을 가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과 같다. 곧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인격적인 교제를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각 곧 하나님의 지혜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며, 그래서 비로소 내 안에도 지혜가 머물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창조자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지혜

지혜를 소유한 자에게는 창조자의 역사가 나타난다. 지혜는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적인 욕구 수준에서 지혜를 구하지 말고, 세상의 일들과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을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과 풍성한 인격적인 교제를 하며, 성령의 생각을 좇아 행함으로써,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통해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머리에서 내려가 마음 판에 새겨지는 지식이 된다. 그 증거가 바로 잠언이다. 솔로몬의 그 수많은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가 다양한 삶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로서 내보인 살아있는 기록이다.

우리는 이제 이 지혜를 품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몸의 건강과 삶의 윤택함이 세상이 좇는 이상(理想)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시작된 지혜가 이미 약속해 주시고 있는 사항들이다. 오직 세상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면서 그 이상(理想)을 ‘하나님 밖’에서 찾기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것을 누리는 축복을 얻는다. 잠언 3장 7-10절을 마음 판에 새기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풍요를 발견해 가는 기쁨을 누리자,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시작하는 첫 걸음이요, 하나님의 풍요를 향한 발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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