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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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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질서

/ 경배와 찬양 /

신대현 목사

예배와 찬양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
성경적 예배: 요한복음 4:23, 24
찬양―그리스도인의 전인적인 삶
삶에서의 예배와 찬양
예배하는 삶에 대한 구체적 돌아봄
예배―그리스도인의 삶의 종합 예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요한복음 4:23-24

예배와 찬양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

교회 예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가지각색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의무로 여기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기쁨으로 드린다. 어떤 사람들에게 예배는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거나 하나님께 감동을 받는 감정의 문제인 반면 다른 사람들에겐 가르침을 받고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문제이다. 어느 것이 옳으냐를 떠나서 현대 사회에서 예배는 점점 영적인 의미를 잃어가면서 일터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피난처 혹은 오아시스로 여겨지고 있다.

예배 양식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회 예배가 따분하며 현실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은사 예배나 현대 감각의 예배가 생겨나고, 각 세대나 기호에 맞는 예배가 더 호소력을 가지며 각광을 받는다. 게다가 성령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회중의 예배 형태는 여러 모양으로 나뉜다.

찬양은 어떠한가? 찬양에 대한 이해는 연령과 교단과 문화와 나라마다 차이가 심하다. 찬양은 곧 예배라는 의견에서부터 예배에는 최소한의 찬양만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이르기까지 그 이해 차이는 매우 크다. 찬양의 형태에 있어서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악기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여기는 반면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해야 한다는 자들도 있고, 심지어 랩송을 부르는 것을 시대의 조류에 따르는 찬양으로 여기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경배와 찬양이라고 할 때 그 의미의 혼란을 가지기도 한다. 곧 경배와 찬양이 찬양 예배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찬양이 섞인 예배를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찬양이 곧 예배라는 말인지 이해에 혼란을 가진다.

과연 예배와 찬양의 의미는 이처럼 사람들의 이해 정도에 따라 내맡겨질 수 있는 것인가? 예배와 찬양의 양식들 이면에 있는 본질적인 중요성은 상관없는 것인가? 경배와 찬양이라고 말할 때 그 둘은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문화와 관점 그리고 시대의 차이에 따라 예배의 형태와 찬양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게 나타나긴 하지만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으로 따를 수 있는 '성경적' 예배와 찬양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예배: 요한복음 4:23, 24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4장 23, 24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직접 예배를 정의해주신 구절이며, 그 안에는 예배의 중요한 원리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망라한 예배의 근간이 되어야 하며, 이 말씀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라야 어떤 배경의 그리스도인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영혼을 열고 젖어들 수 있는 ‘성경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신령으로(in spirit)’ 예배하는 것은 무슨 뜻이며, ‘진정으로(in truth)’ 예배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에 따라서 생각할 때 경배와 찬양은 어떤 관계인가? 경배와 찬양은 교회 예배에만 적용되는가?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나? 

예배―하나님의 요구


먼저 예배는 사람들의 이해 정도를 떠나서 우선적으로 구원 받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구원 역사의 큰 서막을 연 출애굽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 모세를 보내어 바로에게 말하라고 명하신 메시지 안에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가 확인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예배할, Worship, NIV) 것이니라’(출 8:1). 정녕 하나님의 구원이 담고 있는 요구는 예배이다.

장소에 메이지 않는 예배

이러한 예배는 장소에 메이지 않는다. 물론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호렙산으로 부르셨다. 하지만 막상 호렙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난 하나님은 호렙산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호렙산 위로 강림하시는 하나님이셨다(출 19:1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성막도 하나님의 영광을 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막을 안팎으로 채웠다(출 40:34-38). 더군다나 그 성막이 이동할 수 있는 장막이었다는 것이 예배장소가 한 곳에 묶일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심지어 벽돌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솔로몬도 하나님의 계신 곳을 언급할 때에는 성전을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왕상 8:48b, 49).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못 박으며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것을 선포했다(합 2:20). 하지만 이 때의 성전은 구속되지 못한 피조세계와는 구별된 영원한 하나님의 거룩한 하늘 처소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고 했으며(미 1:2), 다윗은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시를 읊었다(시 11:4). 더욱이 하박국의 선포의 강조점은 성전 ‘건물’에 있지 않고, ‘성전’의 기능 곧 말씀이 선포되는 곳으로서의 성전에 있기 때문에 하박국의 이 선포를 근거로 여호와 하나님의 처소를 성전 건물로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신학 안에 갇힌 주장이다.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성전에 계시고, 신약의 하나님이라고 성전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온 천하가 담을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예배 장소가 예루살렘이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해를 고쳐주기 위하여 두 가지 점을 강조하셨다. 하나는 신령(in spirit)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곧 ‘이 때’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이다(요 4:23, 24). 자세히 살피면 이 둘은 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영으로’ 예배하는 것의 언급이 나오고 그다음 하나님이 영이신 것이 소개된 것은 당연한 귀추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렇게 예배해야 할 때를 ‘이 때’라고 강조하신 이유는 예배를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예수님 ‘당대의’ 시대에 예배 장소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이 깊었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앞에 놓고도 예표적 성전인 예루살렘을 고집하는 그들의 감긴 시야에 ‘긴박한 현재적’ 도전을 던지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예배할 때가 ‘이 때’라고 강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이어 말씀하신 것은 예배 장소에 대한 고정관념에 재차 도전을 던지신 확실한 선포였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물질 안에 갇힐 수 없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이 예배하러 나오는 자들이 만나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갖춰야 할 절대적인 전제 조건은 예배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든지 계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신령한 예배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온 천하에 운행하심을 통해서 그리고 특정의 사람이나 장소에 강림하심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신령한 예배가 가능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서 열려진 신약 시대에서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부어지면서(욜 2:28; 행 2:16-18)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예배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고 자기들의 발이 내딛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모든 생활에서 성령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삶 전체를 통해 드리는 예배’와 무교회주의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규모가 작으면 두세 사람일 수 있고, 규모가 크면 공동체를 이루는 조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결코 교회는 ‘무(無)’교회일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교회의 모임을 인정하셨고, 또한 그 가운데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마 18:20). 성도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몸으로’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히 10:24, 25), 주일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지으실 때에 일곱째 날을 거룩히 하시고 그 날에 안식하시면서 창조 세계 안에 부여해 주신 삶의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요, 안식 후 첫 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안식을 누리는 성도만의 특권인 것이다. 

하지만 주일에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의 차원으로만 볼 때 예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예배 안에 있다가 예배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신령으로 예배하는 모습’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산 제사’(롬 12:1)라고 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예수님의 예배 정의 가운데 마지막으로 살필 것은 ‘진정으로(in truth) 드리는 예배’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진정으로(in truth) 예배할 때가 오나니… 예배하는 자가…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받는 성도의 삶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이 없이 사람의 주장이나 요구나 가치관이 중심이 된 예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아니다.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영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그래서 호세아는 예배의 본질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을 아는 삶의 모범이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셨다(요 6:38, 39; 10:37, 38; 17:4). 예수님의 온 생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표현해 낸 온전한 예배였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성도들도 모든 생활에서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려면 우선 진리를 사모하고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 95:6-7).

더 중요한 것은 듣고, 배우고, 알게 된 진리가 행함으로 나타나야만 참 예배라는 것이다(마 7:20, 24). 진리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진리가 삶을 다스려가는 가치관이 된다는 뜻이다. 진리를 행하는 모습은 획일적이거나 수동적일 수 없다. 그것은 다양하고 능동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와 대인관계에서 균형 있게 표현된다. 곧 전인적인 삶의 표현이다. 여러 모습이 있겠으나 성경이 소개하는 모습을 조금만 소개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히 13:15), 복음 전파에 전적으로 헌신하며(빌 2:17), 그리스도인 서로 간에 순종하고(엡 5:21), 필요한 자를 돌보며(마 25:40), 베풀고(히 13:2), 긍휼과 공의로 행하는 것 등이다(약 1:27). 세상의 태도나 가치관을 따른다면 어떻게 이런 모습이 진실하게 표현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성품과 원리를 내포한 삶의 모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그리스도인의 삶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에 기초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찬양―그리스도인의 전인적인 삶

이렇듯 예배가 하나님과 및 이웃과의 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적인 삶’이라고 할 때, 성경은 이 두 관계를 묶는 공통의 요소로서 '찬양'을 소개한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어떻게 ‘찬양’이 전인적인 삶과 연결될 수 있나?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찬양'이 단순히 ‘노래한다’는 의미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위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찬양이 하나님과 및 이웃과의 관계를 한데 묶는 전인적인 삶의 예배의 공통요소일 수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히브리서 13장 15절과 에베소서 5장 19절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의 말씀은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과연 찬미의 제사는 교회나 어떤 집회에서 드리는 찬양 예배만을 의미하는가? 에베소서 5장 19절은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하는데 마음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입으로 드리는 노래나 찬송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말씀도 노래하는 것 이상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로 화답하라

우선 히브리서 13장 15절의 이해를 위해서 에베소서 5장 19절을 앞서 살피면 찬양은 하나님께만 향해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들 서로에게도 향해있는 것을 발견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는 말이 그 증거이다. 여기서 ‘서로 화답하라’는 말씀은 ‘서로 시나 노래에 응하여 대답하라’는 뜻인데 노래로 대답하는 것이야 찬양의 범주이지만 ‘시’로 화답하는 것은 어떤 뜻인가? '시'로 번역된 말은 '시편' 곧 찬양의 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시로 화답하는 것도 결국 찬양으로 서로에게 말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면 찬양으로 서로에게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신령한 노래’로 말하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오페라로 얘기하라는 것인가?

에베소서 5장 19절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 뒤에 나온다. 앞뒤 문맥을 이어서 생각할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연스러운 표현일 수밖에 없다.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분의 온전한 모습을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다 나타내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어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스스로의 서로를 향한 표현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표현이시다. 자기 기분에 내킨다고 서로 찬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령으로(in spirit)’가 아니고선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것’이며, ‘한 성령’ 안에서 나누는 대화, 권면, 기도, 사귐 등이 없이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 찬양으로 서로 화답함이다.

이는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란 말씀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은 방탕한 삶과 정반대로 생활 전반에서 질서가 서 있어야 가능할 수 있다. 곧 성령이 지배하는 질서 있는 삶이 서로 화답함의 무대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의 열매인 서로 화답함은 교회 예배 중의 찬양을 통해 서로 기쁨을 나누는 협소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속에서 형제들 서로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상호간에 삶을 나누면서 누리는 기쁨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찬미의 제사

이런 관점에서 히브리서 13장 15절의 ‘찬미의 제사’도 예배에서만의 얘기가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써 고난을 받으신 것이 언급된 후에(히 13:12) 나온 말씀이다. 예수님이 드리신 단번의 제사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율법의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어졌다. 유일하게 드릴 수 있는 제사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를 ‘찬양하는 제사’이다. 그래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는 말씀이 따라 나온 것이다. 이 찬양은 ‘항상’ 드리는 제사이다. ‘항상’이란 말이 ‘찬미의 제사’ 앞에 붙어 나온 것은 이 찬양이 모든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증거이다.

위의 두 구절의 의미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그리스도인의 ‘찬양’이 예배하는 ‘삶 자체’라는 것이다. 찬양은 예배의 부속물이 아니다. 예배와 찬양은 두 개의 이중 개념일 수 없다. 예배와 찬양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의 전인적인 삶을 나타낸 표현인 것이다. 

삶에서의 예배와 찬양

이제 우리는 예배와 찬양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어디에서부터 예배하는 삶을 시작해야 하는가? 먼저 어떤 삶의 모습에서부터 예배를 회복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가장 큰 틀의 답을 주는 곳은 하박국서(書)이다. 하박국 2장 14절과 20절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결론이 우리가 찾는 답이다―‘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14절),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20절). 어떤 결론이 이 두 말씀에 담겨있는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보면서 깊은 회의와 번민 속에 빠져있던 하박국 선지자는(합 1:3-4,13) 하나님의 묵시를 받고 난 후(2:1-3),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는 믿음의 선포를 하며, 자신의 감정과 처해있는 환경을 향해서만 아니라 온 천하에게 ‘잠잠할 것’을 명하며, 궁극적으로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고백한다(합 3:17-19). 이 고백은 하박국이 수금에 맞춰 부른 노래였다(합 3:19). 하박국서 전체는 ‘삶의 정황’과 ‘찬양의 노래’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예배로 드려지는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예배는 상황이 변하여 평안해질 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상황이 여전하다 해도 예배는 모든 삶―내 삶뿐만 아니라 온 땅의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삶에서 예배가 시작될 수 있는 동기를 찾는다면 그것은 처해있는 어떤 삶의 정황이 아니다. 내 삶 가운데 절대자로 임하여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 예배 시작의 동기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한 자에겐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것에 순복하는 삶이 따른다. 하박국 선지자가 온 천하를 향해 잠잠할 것에 대한 이유로서 ‘여호와는 성전에 계신다’(20절)는 사실을 내세운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가 담겨있다. 본래 장막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실 모든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다(출 25:22).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계실 수 있지만 굳이 ‘성전에 계시니’라고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한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라고 한 것은 정적(靜的)이지 않고, 매우 동적(動的)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시(啓示)를 베푸시는 성전에서 말씀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그 말씀 앞에는 모든 사람이 침묵할 수밖에 없으며 그 분께 순종할 수밖에 없다. 전도서는 이러한 경외의 자세와 그분의 말씀에 순복하는 자세가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예배하는 삶에 대한 구체적 돌아봄
 
교회 예배

먼저 가장 실제적으로 교회에서의 예배 태도는 어떠한가? 온전하지 못한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의 단에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고 경고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이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몸’으로 모이는 교회로 예배하러 나아올 때는 하나님을 향해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지고 나오지 말아야 한다.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 걸리는 모든 부분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최소한의 시간투자, 책임 없이 지위만 지켜가는 헌신, 옆도 안쳐다보는 냉랭함, 예배 종료 바로 전에 슬그머니 빠져 나가는 공동체 기피태도, 쓰다 남은 물건 처분식 구제, 체면치레 헌금, 생색용 한턱 등…. 이것에 더하여 교회의 일을 할 때 항상 ‘가난한’ 기준과 최소 경비에 맞추려 하면서 자기 일은 최고의 기준으로, 아깝지 않은 투자로 진행하려는 것…. 이 모든 것은 이중적 외식을 넘어서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바이다. 

예배는 관람도 아니고 자선(慈善)도 아니다. 결코 혼자드릴 수 없고, 얼굴 도장 찍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기준은 마냥 가난함이어야 하고 자기 기준은 언제나 부요함일 수 없다. 개인주의 기준을 버리고 공동체의 기준을 찾아야 하며, 사유재산의 축적에서 돌아서서 공동체의 나눔을 회복해야 하며, 하나님의 교회에 최선의 기준을 부과할 줄 아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신다. 또한 혼자 흘리는 눈물로만 교회 예배를 회복할 것이 아니다. 그 눈물이 다른 성도들의 마음과 함께 흘릴 줄 아는 눈물이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교회에서의 예배의 회복이 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예배 형태의 다양성은 어떠한가? 전통 예배, 현대 감각의 예배, 멀티미디어 예배, 새대별 예배 등…. 앞에서 다룬 성경적 예배를 따라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예배 형태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찬송가만 부르는 예배에서는 은혜를 못 받는다든지, 드럼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나가버린다든지, 통성기도가 방해가 된다든지… 이러한 문제를 먼저 걸고 나오는 성도는 예배의 본질을 모르는 자이다. 찬송가만 부르던, 드럼을 치던, 목청을 높여 기도하는 성도 옆에서 예배를 드리던 그리스도인은 어떤 예배라도 수용할 수 있는 기본이 있어야 한다. 다양한 성도들의 모습을 포용하지 못하는 성도가 어찌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고 예배를 드리며 앉아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마냥 포용력 없음만을 비판할 일도 아니다. 예배의 기본 이해와 태도가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서, 노인이 신세대예배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호소할 때 왜 포용의 선을 넘어서 배타적인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문제가 생길 때는 어느 한쪽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예배의 공통요소를 부각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신세대예배’라든지 ‘노인예배’라는 형태를 굳혀버리면 성도 간의 일치보다 배타적 문화를 교회 안에 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세대간에 교류 없는 교회 전통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게 되며, 끝내는 세대를 이어가지 못하는 단명하는 교회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문화와 스타일은 도움의 요소일 뿐 본질이 아니다. ‘백인 교회’, ‘흑인 교회’, ‘노동자교회’, ‘경영자교회’, ‘지식인교회’…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포근한가? 아니면 거부감이 이는가? 문화와 계층과 이해의 다양성을 고려하자면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해는 되더라도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시대가 교회를 잡아먹은 모습이다. 문화와 특수성만을 고려하고, 교회 예배의 본질을 소홀히 하는 모든 형태의 예배는 땅의 문화에 희생을 당할 위험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궁극적으로 있어야 할 문화는 ‘천국 문화’이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배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따라 어떤 부류와도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될 때, 그것이 ‘천국 문화’의 예배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모습인 것이다. 

노래로 드리는 찬양

노래로 드리는 찬양은 왜 중요한가? 혹 찬양 자체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진 않는가? 물론 성경은 찬양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한 예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그들의 기도와 찬미 소리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는 일이 있었다(행 16:26). 하지만 찬양 자체는 어떤 주문을 외는 식의 마술적인 힘이 아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나타날 때에 능력을 가진다. 바울과 실라의 찬미 소리가 기도 소리와 동반되었다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찬양은 결코 대상이 없는 노랫가락이 아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는 것이 찬양이며(시100:1-4; 22:3),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찬양이다(시29:1-2). 이런 점에서 찬양을 담은 음악의 장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랩이든 클래식이든 재즈이든 합창이든, 동원되는 악기가 현악이든 관악이든 북이든 장구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락에 심취하거나 흥에 취해 노래하거나 대중 인기에 편승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이것은 찬양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라도 사단의 음악을 담을 수 있고, 판소리라도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찬양을 담을 수 있다. 찬양의 회복은 ‘하나님 중심의 마음의 회복’이지 드럼 소리의 회복이나 스피커 시설의 첨단 회복이나 전문 성악인의 회복이나 대중 인기의 회복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모든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집고 넘어갈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첨단 기기에 대한 의존성이다. 멀티미디어 시설이 잘 갖춰진 환경 속에서 찬양을 드려온 사람은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는 쉽게 마음을 열어 찬양하지 못한다. 마음을 열더라도 더디다. 똑같은 곡을 찬양해도 맛을 느끼지 못한다. 때로는 장비 탓도 한다. 이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보다 기계로 드리는 찬양에 이미 익숙해졌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변함없고 동일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모습을 내면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기본이 충실한 자는 다른 더해지는 축복에 대해서 더 감사할 줄 안다. 마룻바닥에서 육성으로 찬양하는 것을 기본으로 가진 성도는 피아노 소리가 더해지면 감사가 더 충만하여 찬양한다. 최첨단 기기만 가지고 찬양하던 성도는 스피커 볼륨만 조금 달라져도 찬양보다 비판을 하기 쉽다. 바울의 찬양하던 곳이 어디였는가? 감옥이었다. 가장 기본만이 있던 곳이었다. 찬양은 악기의 선율에 노래를 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가락 소리에 악기의 선율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찬양인 것이다.

삶에 임하는 태도

마지막으로는 교회 밖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예배 모습이다. 매사에 일을 행할 때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행하는가? 계획을 세우는 것? 이리 저리 연락할 사람을 뒤져보는 것? 친구에게 전화하는 것? 전문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것?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기도하는 것?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은 단순한 생활의 진행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바로 사단과 싸워 이기는 영적 무기이다.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부터 자신이 서있는 그 땅이 거룩한 땅임을 알게 되었고, 신을 벗음으로써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인정했다.(수 5:14-15) 또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명을 따라 할례를 받고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수5:8-9, 10). 이 두 사건은 예배가 영적 싸움의 무기인 것을 보여주는 삶의 실례이다. 형식을 차려서 드린 예배는 아니었지만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자기가 서 있는 땅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신을 벗음과 같이’ 자기 의지로 행하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그 삶의 영역을 구별하여 드린 것과 하나님의 명하신 바를 잠잠히 먼저 행하면서 그 이후의 삶의 싸움을 진행해 나아갔다는 것이 예배하는 삶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예배와 이웃 사랑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은 이웃 사랑의 근간이다. 예배가 없는 자는 이웃 사랑이 없는 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 1장 27절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로마서 14장 18절의 말씀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 사랑의 모습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 두 모습의 성경적인 틀을 자기 안에 갖추어 나가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5장 19절의 ‘찬양으로 서로 화답’는 의미를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 

예배―그리스도인의 삶의 종합 예술

결국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종합 예술이다. 그 예술은 개인 작품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자기 재능과 자랑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아랑곳없이 자기 세계에 도취되어 빚어내는 예술은 이기적 예술이며, 자기를 신의 경지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의 경배를 자아내는 우상숭배의 촉발물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이 녹아있는 예술을 창조한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고, 참 생명의 길을 사모하게 하며, 의롭게 살려는 의지를 불어 넣어주고, 영원한 가치를 소유하려는 소망을 심어주며, 참 사랑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케 하는 ‘능력 예술’인 것이다. 삶 그 자체가 예배와 찬양인 그리스도인만이 세상에 도전을 던질 수 있고,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통해, 그리고 찬양을 통해 보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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