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2
광야의 소리

신대현 목사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광야’는 어떤 의미를 가지나?(출 15:22; 16:1; 19:1)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시작으로 제시하신 곳은 어디였나?(호 2:14, 15) 메시아의 길이 준비되어야 할 곳으로 광야가 선택된 것에는 어떤 뜻이 있나?(3절; 사 40:3)
사람들은 안 좋은 일이 닥칠 것 같으면 괜한 종교적 두려움 속에서 그 일을 피해볼 생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태도를 예레미야는 무엇과 비교했는가?(렘 46:20-22, 특별히 22절, 뱀의 소리-‘hiss like a fleeing serpent')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질책을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회개는 무엇인가?(신 30:1, 2; 사 55:7; 렘 24:7; 31:18, 19; 호 12:6; 욜 2:13; 눅 1:16; 살전 1:9) 회개에는 합당한 열매가 따르는데(8절), 과연 무엇이 합당한 열매이며, 어떻게 이 열매 맺는 일이 가능한가?(11절) 특별히 성령과 함께 불이 언급된 이유는 무엇인가?(12절; 사 4:4; 슥 13:9; 말 3:2)
‘천국이 가까왔느니라’(2절)는 선포는 완료형이다(참조, 12:28; 눅 11:20). 과연 무엇이 천국인가? 회개와 천국이 함께 선포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겠는가?(참조, 골 1:13, 14)

그 때에

 
예수님이 나사렛 동네로 가서 살게 된지 삼십 년 세월이 지났다. 마태는 그 세월을 ‘그 때에’(1절)라는 한 마디 말로 소개한다. 복음서의 관심이 예수님의 성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누가는 어느 정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태어남을 소개했다. 하지만 누가도 예수님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려 한 게 아니다. 그에겐 역사 기술이 굉장한 관심사였기 때문에, 알려진 사실을 지나치지 않고 기록한 것뿐이다. 더욱이 역사에 주목했던 누가마저도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그 정도로 밖에 밝히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계시하실 때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감추시고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세례 요한의 등장도 갑작스럽다. 이 또한 복음서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는 나사렛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사용된 교량이었다. 그의 사역과 메시지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준비였다. 곧 그가 ‘유대 광야’(1절)를 사역의 터로 삼은 것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2절)고 외친 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작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장소, 이 메시지를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위한 준비로 선택하셨을까?

광야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발한 첫 장소였다(출 15:22; 16:1; 19:1).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렸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시 시작하실 장소로 택하신 곳이 광야였다(호 2:14, 15, ‘거친 들’=광야). 메시아가 오실 길과 첩경을 닦아야 할 곳도 광야였다(3절; 사 40:3). 예수님께서는 그 광야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과 연결하여서 꾸준히 말씀해 온 광야의 모든 의미를 한 곳에서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2절)는 세례 요한의 외침은 ‘예수님이 보이신 광야’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알린 선지자의 선포였다. 과연 그 선포가 요약하고 있는 ‘예수님의 광야’는 어떤 내용을 지니고 있었는가?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선포는 삶의 방향에 대한 도전이었다.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이다(신 30:1, 2; 사 55:7; 렘 24:7; 31:18, 19; 호 12:6; 욜 2:13; 눅 1:16; 살전 1:9). 회개는 단지 재난을 피하기 위한 몸짓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이 잘못된 몸짓을 뱀의 도망침에 비유했다(렘 46:22).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질타했다. 그들이 세례 요한의 긴박한 메시지를 듣고 그의 있는 곳으로 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진노를 피하려는 뱀의 몸짓’에 불과했다. 여전히 그들 안에는 독사의 독이 품어져 있었다. 마음의 생각이 바뀌지 않은 채(12:34) 회개의 몸짓을 보이러 나오는 것은 독사의 속성(참조, ‘독사의 자식’=독사의 성질을 지닌 자)을 여전히 보이는 것이었다(7절). 그것은 회개가 아니었다. 그 안에 품은 독으로 회개를 선포하는 자를 결국 물어 죽일 뿐이다(23:33, 34).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지 않고 세례 베푸는 데 와서(7절) 일의 형편을 살핀 것에 그친 것은 그들에게 믿는바 ‘그릇된 보장(保障: false security)’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확신이었다(9절).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생각한 배후에는 선택받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명백히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렘 31:31). 이미 옛 언약은 파하여졌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더군다나 옛 언약에서도 중요한 것은 ‘약속’이지 혈통이 아니었다(롬 9:7, 8). 동일한 아브라함의 씨라도 이스마엘은 내보내지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기업을 잇지 않았는가! 유대인들이 붙들 것은 아브라함의 조상됨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로 돌이킨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8절). 그 열매는 새 언약이 약속하고 있는바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렘 33:33)으로 인하여 맺는 열매이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진리가 마음에 내주하신다는 뜻이다. 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진리는 ‘성령’이시다. 성령의 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과 불의 세례로 응답하신 결과이다(11절). ‘불’이 함께 언급된 것은 성령의 ‘불같은 현상’을 알리기 위한 게 아니었다. 성령의 여러 속성 중에서 성결케 하시고 구별하시는 일을 특별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12절; 사 4:4; 슥 13:9; 말 3:2).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알곡이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쭉정이나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10, 12절).

새 삶의 터전인 하나님의 나라

 
더불어서 참 회개하는 백성에겐 새로운 삶의 터전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의 지배 아래 살던 사람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골 1:13, 14). 이런 의미에서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은 새 삶의 터전을 제시하는 선포였다. 여기서 ‘가까왔느니라’는 말은 완료형이다. 세례 요한은 이미 도래한 천국, 실제로 주목할 수 있는 천국을 소개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오신 사실’을 천국이 임한 것과 동일시 한 것이다. 이후에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셨다(4:17; 10:7), 하나님 백성의 새 삶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 당신인 것을 재차 확인해 주신 것이다(요 15장, ‘내 안에 거하라’). 이후 펼쳐지는 예수님의 생애와 현실은 이 말의 진실함을 드러내는 사건의 연속이었다(12:28; 눅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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