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17
천국 복음

신대현 목사

예수님은 요한의 잡힘을 듣고, 왜 갈릴리 나사렛으로 물러가셨나?
예수님께서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실 때에 그 기준과 동기는 무엇이었나?
누가복음 4:16-30에는 예수님이 요단에서 물러나신 후 나사렛에서 돌아와서 겪으신 일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사건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게 된 동기였다(13절). 왜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셔야 했는가? 이 때의 동기와 요한의 잡힘을 듣고 그곳에서 물러나신 동기와는 어떤 유사성이 있나? 나사렛을 떠나실 때에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모습(눅 16:30)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예수님의 천국 복음은 17절에 요약되어 나온다.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그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참조, 완료형 시제)고 확신 있게 전파하셨나?
‘회개’는 문자적으로 ‘방향을 돌이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요구하신 회개는 무엇인가? 이미 임한 천국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라

나사렛으로 물러가신 예수님

예수님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물러가셨다. 왜 그리하셨을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역을 한 사람도 요한이고, 예수님을 처음 알아 본 사람도 요한인데 어찌 그리하셨는가? 요한을 자기 오른팔로 삼으셨어도 남음직 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최소한의 감사의 표시로 그에게 동정은 표하셔야 했을 텐데, 그의 잡힌 소식을 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정하게 그곳을 떠나시다니….

예수님은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셨다. 사람의 생각을 따르셨다면 정의를 외치며 구명 운동이라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 허락하시는 반경 안에서 움직이셨다. 만약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사람들로부터 어떤 소리를 들을까? 비난의 화실이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사람의 사귐은 이 땅에서 영원할 수 없다. 언젠가는 ‘이별’을 맞는다. 이별의 모양이 다를 뿐이지, 모두는 헤어진다. 이 땅에 정착할 수 없는 것은 필연이다. 이럴진대 하나님의 뜻이 더 분명할 때는 인정에 메이지 않고 과감히 옮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하나님의 큰(=장기적인) 비전을 품은 그리스도인은 ‘순간의 생각’에 붙들려서 위험을 무릅쓰려 해서는 안 된다. 한 번의 ‘의(義)’로써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비록 아픔이 있을지라도, 또 이해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지라도, 더 분명하신 하나님의 장기적 부르심을 택하여 움직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선명한 길인도

그러한 움직임은 결코 모호한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상황마다 당신의 백성에게 분명한 표시를 보이시면서 길을 인도하신다. 예수님의 인생 경로에는 매 순간 하나님의 구체적인 표시가 있었다. 가버나움으로 가시기까지(13절) 예수님의 행로에는 움직여야 할 표시가 명확했다—로마 황제가 명한 인구조사(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눅 2:1), 헤롯의 유아 학살에 대한 경고(베들레헴에서 애굽으로, 2:13), 헤롯 왕의 죽음(애굽에서 유대로, 2:19, 20), 그 아들 아켈라오의 폭정(유대에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2:22), 요한의 세례(나사렛에서 요단으로, 3:13), 요한의 잡힘(요단에서 다시 갈릴리 나사렛으로, 12절),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눅 4:16-30). 그리스도인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가벼이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항상 하나남께서 주신 ‘큰 비전’ 안에서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표시를 발견한 자는 움직여 가야할 방향이 분명해 진다. 그리고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을 향하여 믿음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된다.

나사렛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사렛으로 옮기셨다(12, 13a절). 하지만 나사렛에서 오래 머무르실 수 없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낭떠러지에서 밀쳐 내리치려고까지 했다(눅 4:16-30). 예수님은 분노한 군중 가운데로 지나가셨다. 아무도 예수님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권세였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람을 굴복시킬 수 없다. 이러할진대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실로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겐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가 그 사람과 동행한다. 땅의 권세를 가진 자들과 같은 수준에서 맞서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며, 그 와중에 절대적인 필요에 따라 말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빛의 이동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예수님의 이동은 빛의 이동이었다(16절).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의 진행이었다(14절).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행로 중에 있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하나님의 큰 빛을 보며, 약속의 성취를 맛본다. 소경 바디매오(막 10:46),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9:20), 삭개오(눅 19:2)… 이들은 예수님의 행로 곁에서 그 빛을 보고 구원을 얻은 자들의 대표이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

가버나움으로 옮기시면서부터 예수님은 비로소 복음을 전파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17절). 예수님의 복음은 ‘천국 복음’(23절)이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왕 되심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가 있다. ‘가까웠느니라’는 가까운 미래가 아니다. 완료형 시제이다. ‘이미 곁에 와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 전파는 그 천국이 바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미 임하였다는 것을 알리셨다. 

회개하라

‘회개’는 방향을 틀어 돌이킨다는 뜻이다. ‘회개하라’는 말은 방향을 틀어서 그 천국을 맞이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향할 때는 인생의 방향을 잃는다. 그러나 돌이키는 순간 하나님이 보이며, 그분의 나라를 향한 분명한 인생 방향이 선다. 예수님의 회개 촉구는 인생이 향할 바른 방향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이어야 한다. 그것이 본래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취하여야 할 태도가 하나님의 왕 되심과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는 것임을 천국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알리셨다. 그리고 그 천국이 ‘이미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전파하시면서 사람들의 시선과 믿음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신 것이다. 이제 이후로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시는 일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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