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2
비판하지 말라

신대현 목사

1-5절의 비판은 어떤 종류이며, 왜 생기는가(23:28)? 이런 비판자를 예수님은 어떤 자라고 하셨나?(5절) 자기 안에 더 큰 허물을 가지고서 형제를 비판하는 자는 어떤 결과를 맞나?(2절; 롬 2:1; 약 4:11)
외식은 왜 생기는가?(벧전 2:1, 2) 외식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참조, 22:18; 23:13, 15; 딤전 4:1, 2) 외식을 버리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참조, 막 4:24)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참조 약 1:22; 갈 6:3; 고전 3:18) 외식을 완전히 버린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나?(참조, 롬 8:13, 14; 벧전 1:22)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판단하면 안 되는가?(참조, 고전 5:12; 6:2, 5; 10:15; 11:13; 14:24) 판단하는 일과 관련해서 6절은 어떤 의미인가?(참조, 고전 2:14; 11:3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명령은 어떤 뜻인가?(참조 눅 11:8; 히 4:16; 눅 18:1-8) 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가?(참조, 약 1:14, 15)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좋은 것’은 무엇인가?(눅 11:13)
기도 명령 끝에 나온 가르침(12절)을 5절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라. 진실한 의미에서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어주는 것’은 어떤 태도인가? 왜 12절의 말씀과 22:37-40의 말씀이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로 동일하게 요약되었는가?

외식하는 자여

비판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다른 비판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비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간의 ‘자기중심의 형제 비판’이다. 예수님은 형제를 비판하는 자를 일컬어 ‘외식하는 자여’라고 부르셨다(5절).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붙인 것과 똑같은 이름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왜 외식하는 자로 불렸나? 율법을 지키노라 하면서, 율법의 참 정신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도 생각이 전혀 바뀌지 않은 채 ‘모양만 제자인 자’는 외식하는 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외식’이란 단어를 쓴 것은 여기가 유일하다(참조, 눅 6:42). 외식하는 제자는 악한 종과 매일반이다.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여지는 것이 악한 종이기 때문이다(24:51). 

참 제자는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자여야 한다(롬 12:1). 마음이 변화하여 외식을 벗어야 한다. 생각하는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무엇이 생각을 바꾸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 아니, 생각만 아니라 아예 사람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신다(벧전 1:23).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 안에서 새 생각이 나오게 하시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외식을 버리라고 하면서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명령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벧전 2:1, 2). 하나님의 말씀만이 외식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고한 기준이 없는 마음은 ‘껍질 신앙’을 만든다. 그것은 진리에 확실히 서있지 않는 다른 사람까지 미혹하여 그릇된 신앙 태도를 가지게 한다(갈 2:13). 즉시로 진리의 책망을 받아서 외식하는 태도를 고치면 문제는 그친다. 하지만 계속 외식으로 일관하면, 진리가 더 이상 심어질 수 없는, ‘양심에 화인 맞은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다. 믿는 사람까지 미혹하여 믿음에서 떠나 다른 가르침을 좇도록 만들기에 이른다(딤전 4:1, 2). 외식은 실로 무서운 결과를 낳는 것이다.

바로 ‘자기중심의 형제 비판’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제자’에게서 드러나는 외식의 표시이다. 이런 비판은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일 수 있어도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데에서 나온다(23:28).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사람의 계명만 있는 결과이다(막 7:6-9). 이런 태도는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형제를 시험에 빠뜨리고(22:18), 실족시킨다(23:15).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23:13). 

자기 안에 더 큰 허물을 가지고 형제를 비판하는 자는 그 비판으로 자기가 비판을 받게 된다(2절; 롬 12:1). 그러한 비판은 자기를 정죄하는 것과 같다(롬 2:1). 자기가 들이대는 비판의 기준에서 결코 자신이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비판하는 사람치고 자기가 그릇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비판하는 사람은 객관성을 잃는다는 얘기이다. 스스로가 입법자가 되어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물 가운데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하나님이시다. 그러하니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 결국 ‘비판을 받는다’는 표현에는 그 끝에 하나님의 심판이 숨어있는 것이다.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외식을 버리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마가복음 4장 24절 말씀이 이에 대한 답을 준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리를 듣고, 그것을 기준 삼아서 진리 안에서 생각하고 헤아리는 자는 진리로 헤아림을 받는다. 진리의 깨달음과 복이 임하는 것이다. 임하되, 자기가 생각하고 헤아렸던 것 이상으로 임한다. 반대로 사람의 말과 지혜와 소문에 마음이 솔깃해져서 그것으로 자기 헤아림을 삼으면 미혹의 영으로 헤아림을 받는다. 진실을 잃고, 스스로 거짓말하는 자의 짝이 되는 것이다. 진리를 들으나 그것으로 헤아림을 삼지 않고 듣는 것으로 끝내도 똑같다.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약 1:22).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고(갈 6:3),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고전 3:18). 바로 이것이 제 눈 속에 있는 들보이다(3, 4절).

이런 자는 자기 눈에 들어있는 그것대로 남의 눈을 본다. 자기 판단이 진리를 대신하여서 그것으로 형제를 낮춰 평가하고, 허물을 사정없이 드러낸다. 진리 없는 세상이 행하는 바이다. 재갈 먹이지 않은 혀의 불이 인생들을 죽이고 있는 세상의 형국이다. 비판으로는 변화가 없다. 나아짐이 없다. 비판이 난무한 세상이 과연 예전보다 좋아졌는가? 남은 고사하고 스스로를 구원했는가? 결코 아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만이 몸의 행실이 죽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 시작된다(롬 8:13, 14). 성령이 전하시는 진리를 순종하는 자는 자기 기준이 없어지고(자기 들보를 빼내고), 영혼이 깨끗해진다. 그러한 자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벧전 1:22).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에 연결되어 나오는 기도 명령(7-12절)에서,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좋은 것이 누가복음 11장 13절에는 ‘성령’으로 밝혀져 있는 데, 비판에 대한 가르침의 자연스러운 끝맺음이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도무지 사람의 비판하는 성향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기도의 문제로 바로 연결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비판의 파괴 성격으로 보아서는 그렇다.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혀 판단력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진리를 가졌기에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전 10:15; 11:13). 더 나아가 판단할 권한이 주어져 있다(고전 5:12; 6:2, 5; 14:24). 하지만 아무 상황에서나 그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6절). 영적인 밭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진리가 심겨질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세상의 영을 가진 사람을 진리대로 이것저것 판단해봐야 먹히지 않는다. 역으로 달려들어 짓밟는다. 세상은 온통 비판의 영으로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가진 자라야 자기 잘못에 대해서 진리의 판단을 받을 때에 그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여기고 돌이키는 것이다(고전 11:32). 

성령을 모신 자라고 해서 다 즉시 돌이키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내주해 계셔도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아니하면 다시 어리석게 된다. 주의 뜻을 이해 못하고, 자기 지혜가 앞서서 다른 것에 취해 살기 쉽다(엡 5:17, 18).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비판의 가르침에 이어서, 성령(좋은 것)을 응답으로 받는 기도의 명령이 나와 있는 이유이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7절)는 명령은 따로 의미가 있는 세 개의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하라는 뜻이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과(눅 11:8; 히 4:16)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눅 18:1-8).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려있다(히 10:20).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것이 인색해서도 아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롬 8:32). 그토록 절실하게 매어 달리는 기도가 필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는 시선을 잠시라도 늦추면 어느새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시험에 빠지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이다(약 1:14, 15). 더군다나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인데(약 1:17),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잃으면 어찌 되겠는가?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것이다. 

기도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길이다. 자기 판단과 비판에 이끌려 사단의 유혹을 따랐던 하와와 아담의 죄를 거듭하지 않는 길이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길이다. 그리하여 옳은 판단력을 가지고 죄에 빠진 형제를 권면하고, 이단의 가르침에서 교회를 지켜내며, 하나님의 빛을 이 땅에 끌어내려 어두운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녀에게 당신의 것(좋은 것[성령])을 기꺼이 주고자 하신다(눅 11:13).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성령)을 받은 자만이 ‘제자로서’ 온전히 서는 것이다(행 1:4, 8).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기도 명령 끝에는 다시 형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12절). 이 말씀은 5장 17절에 언급된 율법과 선지자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이요 요약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율법과 선지자에 대한 가르침이 정확히 5장 17절에서 시작하여 이 구절에서 결론을 짓고, 13절부터는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고 볼 수 없다. 산상수훈은 5장 첫 절부터 7장 마지막 절까지 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율법과 선지자라는 주제를 중간에 토막으로 구분 지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12절의 말씀은 상당히 앞서 언급된 5장 17절의 결론으로 볼 것이 아니라 더 가까운 문맥과 연결시켜 생각해야 한다. 바로 1절에서 언급된 형제에 대한 태도의 결론으로 봄이 옳다. 

기도하는 제자,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성령)을 받은 제자는 외식을 벗는다. 눈의 들보를 빼낸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하셨고,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다(5절).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 주는 것은 ‘사랑’이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었던 고통을 알기 때문에, 들보를 빼낸 자는 형제 눈 안에 티를 빼내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22:39). ‘자기 몸의 형편’을 알게 된 자만이 자기 몸과 같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의 형편을 알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눈에 들보가 있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외식을 벗어나게 해 주신다. 그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것만이 자기 몸의 형편을 끊임없이 살피는 길이다. 자기가 어떠함을 아는 자라야 이웃의 형편을 먼저 자기 몸 안에서 느끼고 살펴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이다. 이런 이유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명령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2:37-40)는 두 명령이 동일하게 ‘율법과 선지자’란 말로 요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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