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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비전으로 바라보는 세상

신대현 목사

비전은 어떻게 임하나

미가는 소선지서에 나오는 선지자 중 한 사람이다. 소선지서라 함은 책의 분량으로 인해서이지 선지자의 알려짐이 적었기 때문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미가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백성 전체를 재앙에서 돌이켰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렘 26:18).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에 사람으로서 막강한 영적 영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쳤던 자였다.

그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묵시를 주셨다. 묵시는 곧 비전이다. 묵시라 함은 말없이 보인다는 뜻인데 아무개가 비전을 받았다 혹은 소유하고 있다고 할 때 과연 그 비전은 어떤 모양으로 임하는 것인가. 

1절은 비전이 임하는 경로를 말해준다.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비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임한다. 그러나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허공에 대고 전해지는 것이 없다. 항상 대상을 가진다. 비전이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대상을 분별하여 보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대한 것일 수 있고 교회에 대한 것일 수 있고 더 넓게는 시대를 향한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깨닫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비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미가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해 주신 말씀 가운데서 주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품게 되었다.

가장 쉽게 타락할 수 있는 것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예배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이 두 곳은 그 유명세에 걸맞지 않게 타락의 중심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가장 쉽게 우상으로 변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생각할 때 바로 '믿음의 활동이 있는 곳'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의 활동이 변질되면 그곳이 가장 적극적인 이단적 우상숭배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아예 종교 형태가 없었던 곳이라면 생짜 베기로 남아있기라도 하지만 예배가 드려지던 곳이 타락하면 걷잡을 수 없는 악한 영의 세력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곳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엄하고 두렵다.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도 바벨론의 여신 숭배에서 온 것이 아닌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중세의 그림들은 바벨론의 영향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하나 같이 예수는 아기로 나오고 마리아는 그 예수를 안고 있다. 마리아의 여신화(女神化)로 인한 결과인 것이다.

그뿐인가. 개신교 안에도 얼마나 변질된 모습들이 많이 있는가. 간판은 멀쩡히 '교회'라고 붙여놓고 그 안에서 행해지는 것을 들여다보면 무속신앙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잡귀나 쫓고 있고 돈이나 긁어내고 있으며 모양만 세우지 않았을 뿐 부처나 갖다놓고 염불이나 외면 딱 알맞을 곳도 많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지 않았는가. 다산을 위해 자식을 불 가운데 태워 드리고 제사장들은 돈을 갈취하고 아세라와 송아지 신상을 세워 복을 비는 비참한 영적 타락을 자행하지 않았던가. 

우상과 음행함으로 거두어들인 모든 것은 그 값이 아무리 많이 나간다 하더라도 음행의 가치 이상이 될 수는 없다(7절). 기생의 값으로 모은 것은 기생의 값으로 돌아갈 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빈다고 해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자는 없다. 하나님께서 어찌 우상에게 드린 값을 취하시겠는가. 심판은 달리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값싸게 취급하는 데에서 임하는 것이다.

공의가 상실된 사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타락한 곳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게 된다. 이웃은 탈취의 대상일 뿐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행할 이유가 없게 된다. 심지어 침상에서도 악을 꾀할 만큼 행악하는 일에 쉼이 없는 그야말로 잔인한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재판이 시작되는 것이 유대의 관습이었다. 없이 사는 사람들, 눌려 사는 사람들은 날이 밝을 때에 공의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손에 힘이 있는 자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힐 때에 그 찢어지는 아픔을 누가 대신 느껴줄 수 있으랴. 

농경 사회에서 '밭'이라 함은 그 소유자의 생명이요 자유함의 전부일터인데 그것을 빼앗는 것은 살인을 저지르는 만행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잠잠히 머물러만 있지 않는다. 동일한 것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일 뿐만 아니라 그 공의는 탈취자로 하여금 영원히 하나님의 구획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는 심판을 수반한다(5절).

우리에게 힘과 재물을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모양일까. 없는 자를 위로하고 공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모습일까.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구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한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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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을 잃은 곳에는 무질서가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그러합니다. 미가의 외침의 대상이 우리 시대가 되어진 것이 참으로 저의 생각을 깨우고 제게 비전을 보여줍니다. 주님, 더 많은 압제가 있을 것이고 더 많은 배역이 있을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아는 지혜를 가지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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