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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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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30
그리스도인

신대현 목사

[사도행전 11-15장] 행 11장 작은 출발


메시지를 열며...

믿는 자들은 자기들을 제자, 성도로 부른 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비하하며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얼마나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따랐으면 이런 별명을 붙였겠는가. 과연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까지 어떤 배경이 있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는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배우고 취해야 할 모범은 무엇인가.

1.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까지는 다수의 수고보다 몇 사람의 '민족의 벽을 뛰어넘는' 헌신이 있었다.

신실한 형제인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서 유대의 믿는 자들을 북으로 피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핍박은 성도들을 흩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하나님의 손이 있었다. 사실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죄가 품는 생각이다(창 11:4). 주님도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흩어진 자들에겐 반드시 하나님의 미션이 있다. '흩어짐'에는 우리가 허물기를 거절해 오던 삶의 장벽을 뛰어넘으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사실 장소만 이동했다고 흩어진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만 도를 전했다.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이 왜 흩으셨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행하는 처사였다. 어떤 모양으로든 외국으로 나오게 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흩으시는 인도가 있다. 그런데 우리도 이 다수의 유대인들처럼 여전히 '한인'과만 상대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벽'을 뛰어넘으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삶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몇 사람은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했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21절):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 안디옥 교회는 '주 예수'에 대한 복음을 들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사도행전 11:25-26

몇 사람은 '주 예수'를 전파했다. 과연 예수님이 주(主)가 아니고서야 다른 이에게 어찌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할 수 있었겠는가. 혹 우리의 삶의 보좌에 예수님이 주(主)로 좌정하여 계시지 아니하기에 확신에 찬 증거가 없는 것은 아닌지... 사실 전도란 말 잘하고, 인간 관계 잘 맺는다고 되어질 일은 아니다. '주 예수'를 분명히 전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전하란 얘기는 아니다. 사귐을 먼저 갖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려는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주 예수'를 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남이 지속되지 아니할지라도 예수를 전해야 하는 것은 양보할 것이 아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한 것이다(21절).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길 잃은 양, 아비를 떠난 탕자, 방향을 잃은 영혼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했다면 그것은 그들을 위해 길을 보이는 안내자, 문을 열어주는 수문장이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이미 삯을 받고 추수를 거두는 일군에 불과하다(요 4:35-38). 더 삯을 요구할 것이 없고, 다만 일만하면 되는 일군들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순간을 더 달라고 떼쓰는 시간에 힘을 탕진하고 있는지... 그러면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는 사람들을 '거두기만' 하면 된다는데 왜 나는 이리 용을 써도 사람들이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안디옥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까지 그 배후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했던 바나바를 주목하고자 한다. 그로 인하여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고 했는데(24절) 과연 그에겐 우리에게 없는 어떤 모범이 있었던 것인가.

3. 안디옥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까지는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로 복음을 가르쳐준' 바나바가 있었다.

바나바는 본명이 요셉이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뜻은 권위(勸慰)자, Son of Encouragement)'로 일컬었는데 이는 사람들을 격려해주는 그의 성품이 특별났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착한 사람'으로 소개된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외에 착한 분이 없다고 하셨는데(막 10:18), 어떻게 해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으로 불릴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위로'하는 그의 성품이 곧 하나님의 성품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안위의 하나님(God of Encouragement, 롬 15:5 NRSV)'이고, 그는 '안위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로마서 15:4는 '성경의 안위(Encouragement of Scripture)'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안위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것을 암시한다. 바나바가 어떻게 안위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릴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생각건대 그의 입에서는 자기 말이 아닌 성경의 안위하는 말씀이 흘러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전도하는 말에 성경의 안위의 말씀을 담아 보라. 내 말이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 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전도하게 해 보라. 분명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탕자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것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격려와 사랑이었지 않은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탕자들이라고 할 때 그들 기억에는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가 있다. 그 아버지를 떠올려 줄 때 그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21절). 그러고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강퍅함이야 우리가 어찌하랴.

바나바의 착한 성품은 '성령과 믿음이 채워질 수 있는 인격'이었다. 사심으로 가득한 자는 남을 위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나바는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는 그러한 자였다. 또 그는 형제를 세우되 '끝까지' 세워주는 자였다. 살기 등등했던 바울의 회심을 제일먼저 받아주었던 자도 바나바였고(행 9:26-27), 바울이 성경에 능통하고 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그를 다소에서 찾아내어 꼭 맞는 자리에 세워준 자도 바나바였다. 형제와의 만남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끝까지 기억에 담아두면서 그 형제를 세워줄 수 있었던 바나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형제의 모범'이 아니겠는가. 너무 많은 '형제들'을 만나서 '형제들에 치여' 산다고까지 느끼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아닌 '바로 그 형제'를 '지금 이곳에서' 만나서 알게 된 데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이 있고 또 앞으로의 계획이 있는 것이다. 소홀히 대할 형제는 한 사람도 없다. 혹 그러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홀대하는 것이리라. 

메시지를 닫으며...

이러한 바나바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안디옥의 형제들은 또한 안위의 성품을 가졌지 않았겠는가. 그들이 감사를 바나바나 바울에게만 돌리지 않고, 자기들의 사랑의 표현을 '그 힘대로' 어려움에 처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뻗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사람의 삶이 나은 열매라고 하겠다. 위로하는 형제들은 위로하는 형제들을 낳고, 그 위로하는 형제들로 인하여 우주적인 교회는 세워지는 것이다. 우리도 그 우주적인 교회 안에서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착한 마음의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지는 사람들이고 싶다.

기도

주님, 제 안에 벽을 허물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 사람의 헌신이 안디옥의 교회를 세우는 초석이 된 것을 봅니다. 제 안에 주 예수가 계시오니 제 능력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실 때 저를 사용하는 것을 알게 하여 주세요. 그리고 말을 전할 때에 성경의 안위하는 말로 전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위로를 듣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세요. 주님, 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고 나서는 자인데 혹 다른 사람들에겐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는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착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위로자로 일컬어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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