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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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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8-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Into) 세례

[세례들 (I)]

신대현 목사

세례들(II) <예수와 합하여 받은 세례>
생활신학 [교회질서: 神學] 유아세례
새벽말씀 28:11-20 예수님의 선교 명령



들어가는 말

‘세례’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식(禮式)’을 떠올립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나온 후 세례를 받을 때는 제일 처음 공적인 자리에 서서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순종하며 살 것을 다짐하고, 교회(=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인의 의무를 다할 것과 치리에 복종할 것을 서약합니다. 하지만 세례 후에 신앙 고백과 무관하게 살면서 교인의 의무와는 전혀 상관없이 공동체 생활이 형식에 머물고, ‘개인’의 생활과 목표를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를 구하는 것보다 앞세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그 사람에게 세례가 무의미해졌다면 재(再)세례를 받아야합니까? 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를 언급한 히브리서는 “세례들”(히 6:2)이라고 했는데, (위와 같은 사람의 경우를 염두에 둔) 여러 번의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례의 여러 종류들‧방식들(참조, 유대인들의 여러 씻는 예식들, 히 9:10)’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세례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례는 위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처음으로 내면의 고백을 공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입니다. 이 세례는 그 예식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예식을 반복해봐야 무의미합니다. 히브리서가 복수(複數)로 표시한 “세례들”은 반복되는 세례 예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재(再)세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보다 예식에 의존하여 구원을 확인하고 신앙을 회복하려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외형적 예식에 의미를 두는 태도를 견제(牽制)합니다. 또한 “세례들”은 ‘세례의 종류(예, 유아세례‧성인세례)’나 ‘세례의 방법(예, 뿌림‧잠김)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엡 4:5)의 세례를 얘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세례들”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들”이란 말을 이해하려 할 때 세례의 횟수나 종류나 방법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생각을 예식에 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마태복음 28:19

“세례들”은 그 당시 알려진 두 세례 곧 “요한의 세례”(행 18:25; 19:3)와 “예수님의 이름으로(=안으로, into) 세례”(행 19:5; 10:48)를 하나로 보지 않고 둘로 구분하기 위해서 쓴 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을 때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행 19:3)고 물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를 가르칠 때 두 세례를 구별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세례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안으로, into) 세례”를 다시 베풀었습니다(행 19:3-5). 이럴 정도로 바울은 두 세례의 구분을 명확히 했습니다. 이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가 물로 머리를 적시느냐 아니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느냐 하는 방법의 문제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가 예식(禮式)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바울이 굳이 동일한 (물)세례 예식을 ‘반복’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가 지닌 의미가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과연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가 무엇이기에 다시 세례가 베풀어져야 했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세 번째 단락에서 “예수의 이름으로(=안으로, into) 세례”라는 제목으로 다루었습니다).

또 하나 가능성은 “세례들” 안에 ‘성령세례’가 포함될 수 있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성령과 세례를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11:16). 위의 두 세례 곧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그 세례들이 가지는 의미’와 함께 예식이 따랐습니다. 둘은 ‘예식’이 있는 세례였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는 사건(=성령세례)’은 세례 예식보다 먼저 일어나거나(행 10:44-48), 세례를 받고 곧이어 안수할 때 일어나거나(행 19:5-6), 세례를 받은 후 시간이 지나 따로 안수를 받을 때에 일어났습니다(행 8:16-17).

그러면 ‘성령세례’는 ‘안수’라는 예식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성경을 더 자세히 살피면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행 10:44). 다른 경우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을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행 8:15) 했고, 기도가 선행된 후 안수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내렸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마술사 시몬이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 8:19) 하고 말할 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하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이 안수 예식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 중 <안수>에 대한 설명 참조).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세례는 “예식”이 아니라 여러 통로‧방편을 통해서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종합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들을 때, 믿을 때, 기도할 때 등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하신 것과 같이 성령의 임함은 그 발생이나 결과를 사람이 통제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부어주실 때 사람이 선물로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세례들” 안에 포함시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성령을 받는 일이 예식의 하나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 설명을 더 덧붙이자면 “세례들”이 일차적으로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된 말이지만 부가적으로는 ‘세례의 복수적인 의미’를 전달하려고 사용된 말로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들’이란 말이 세례의 ‘연합(聯合)적인 의미’ 내지 ‘공동체적인 의미’를 고려한 말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가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세례의 ‘복수(複數)적인 의미’가 생소하겠지만 성경은 세례를 개인 혼자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라는 말은 세례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겪는 일’이라는 뜻이요, “세례를 받은 우리”란 말도 세례가 어느 특정인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일어난 일임을 알려줍니다.

성경은 구약에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세례에 비유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b-2)라고 증거합니다. 세례가 공동체적인 체험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성령을 받은 일이 공동체적인 세례로 묘사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후 12:13). 이처럼 ‘세례’는 구원받은 공동체가 함께 공통으로 겪는 체험을 대변하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외 없이 다 받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뒤에 설명 참조)입니다.

요한의 세례

이제 요한의 세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례는 유대인의 결례(潔禮)와 다릅니다(요 3:25; 히 9:10). 유대인의 결례는 모세 율법에 기록된 여러 씻는 예식들, 그리고 이후 유대주의 전통이 제정한 많은 정결 규정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의 결례는 부정(不淨)에서 깨끗하게 된 표시로서, 혹은 부정을 씻는 예식으로서 행해졌습니다. 이에 반해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행 13:24; 19:4)입니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국이 가까웠으니(=구약에 예언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곧 메시아가 도래하여 나라를 회복하고 이방에 심판을 행하는 날이 도래하였으니)’ 회개하라고 외쳤고, 백성들은 ‘자기 죄를 자복(自服)한 표시’로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았습니다(마 3:1-3).

적어도 이 세례를 받은 유대인들은 요한이 외친 메시지를 사실 그대로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 그 메시아가 예수님인 것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단지 열 두 제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 5:1; 9:37; 눅 6:13). 그들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행 19:4; 마 3:11; 눅 3:16; 요 1:33) 말했는데 예수님이 나아오실 때 바로 이 사람이 자기 뒤에 올 것이라고 얘기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확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요 1:30).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증거만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들과 가르침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과 불(=심판)”로 세례를 주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참조, ‘성령으로 세례’는 교회 시대가 시작한 이래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을 뜻하며[요 7:39; 14:26; 행 1:5, 8]; ‘불로 세례’는 ‘세상 종말에’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요 5:27; 딤후 4:1] 불신의 세상에 베푸실 심판을 일컫는 말입니다[히 10:27; 벧후 3:7; 계 18:8]).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려워서 예수님을 떠났고(요 6:6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는 심지어 열 두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사십 일 후 하늘로 올리어 가실 때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하신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님”이 사도들을 포함하여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던 일백이십 명의 무리에게 임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전하였고, 베드로는 자기들을 지켜보던 군중들에게 이것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 성취임을 알렸으며,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가 주(主)요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행 2:1-36). 이때 군중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물을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안으로, into)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답했으며, 또 여러 말로 확증하고 권하면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받은(행 2:1-36)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안으로)” 세례를 받아 제자의 수에 더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이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많은 유대인들이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요한의 세례와 겹치는 이중(二中)의 세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성격의 세례임이 분명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안으로, into) 세례
[참조: <세례들-II> 로마서 6:1-11 예수와 합하여 받은 세례]

“이름으로”는 ‘근거‧준거(準據)(=…에 의해서[by]‧따라서‧근거로)’ 또는 ‘행위‧수단‧매개(=…[으]로‧의하여)’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세례를 베풀 때 “내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고 말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권위로’ 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불러서’ 세례를 베푼다는 뜻이 아닙니다. “…으로”에 해당되는 헬라어의 더 정확한 번역은 “…안으로(into; εις)”입니다. ‘방향‧장소(=…의 안[방향]에[으로])’를 말합니다. 그래서 “…으로”는 ‘헌신(commitment)’이나 ‘동일함(identification)’을 뜻합니다. 세례의 경우에는 “이름으로(into the name)”이기 때문에 “이름으로 세례”는 ‘그 이름으로 헌신’이나 ‘그 이름과 동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인격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름”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특히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격체를 이 땅에 소개하는 방식 중에 하나로서 ‘이름’이란 말을 씁니다(예,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신 12:5). “예수의 이름”은 예수님 자신과 동일하며, “예수님의 인격체”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과 “으로”가 합하여서 “예수의 이름으로”란 표현은 “예수님의 인격체 안으로”이며, ‘예수님께 헌신 또는 예수님과 하나 됨’을 뜻합니다. 성경은 세례를 얘기하면서 우리가 예수님께 헌신하고 예수님과 하나 되어야 함을 여러 군데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위의 설명을 염두에 두어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라는 말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잠긴다, 담그다’란 뜻입니다. ‘무엇에’ 잠기느냐 할 때 흔히 ‘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식을 먼저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식이 먼저 생기고 그에 따른 말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고서 그에 따르는 예식이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식이 다 그러합니다(예, 할례, 제사들). 물에 잠기느냐 아니냐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성경은 물에 ‘어떻게 잠겨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어디에 그리고 왜 잠겨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잠기라(=세례)고 답합니다(19절). 삼위일체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고, 하나님 안에 잠기라는 얘기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에 잠기는 것은 ‘하나님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기도의 응답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요 17:21, 23).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고 하신 말씀도 세례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동일한 메시지로 모든 족속을 세례로 초청하십니다(마 28:19). 이것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되려할 때 다른 어떤 것에 우선하여 ‘어디에(=무엇에)’ 헌신해야 하는지(=잠겨야 하는지;=세례)에 대한 답입니다.

‘왜’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잠겨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사람이 삼위일체로(=안으로) 세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곳이 사람이 거할 본향이며, 그곳에서만 “새 생명” 가운데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잠기는가(=세례)’?

‘어떻게’의 문제도 예식의 방법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0절)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세례에 따르는 제자의 본질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잠기느냐’의 답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함”(롬 6:17)으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생각을 무릎 꿇리는 것이 온전히 하나님 안에 잠기는 태도입니다(고후 10:5).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셨고, 그리하지 않은 자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세례)’이 없고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헌신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는 ‘교인’이 되어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해 주는 예식’이 바로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입니다. 그 사람은 이제 세례 교인으로서 새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주님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이름 안에)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하신 약속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세례와 가르침의 순종에 이어서 약속해 주신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절) 하신 말씀이 ‘새 제자 된 한 영혼’의 삶에 온전히 이뤄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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