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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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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58
부활

[죽은 자의 부활]

신대현 목사

새벽말씀

15:12-19 부활 소망
15:20-34 날마다 죽는 것이 자랑일 수 있는 자
15:35-49 하늘에 속한 자의 형체
15:50-58 사망의 지배를 벗어난 자

들어가는 말

초대 사도들의 메시지를 보면 항상 부활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들을 가르치며 전도했습니다(행 4:2). 이것을 싫어하는 종교 지도들이 그들을 투옥하고, 도를 전하지 말라고 협박했지만, 사도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덴 사람들의 종교, 도덕 재판소였던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요점은 “죽은 자의 부활”(행 17:32)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들은 자 가운데는 기롱하는 자도 있었고, 다시 듣겠다는 자도 있었으며, 그를 따르며 믿은 사람도 몇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에서도 부활을 전했습니다(행 23:6). 이로 인하여 공회에 분쟁이 생겼고, 바울이 로마로 이송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주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잡히던 날 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며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 23:11)고 하셨습니다. 로마에서도 예루살렘에서처럼 ‘주의 부활’을 동일하게 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만 아니라 바울의 삶 자체가 ‘부활’을 향한 싸움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빌 3:10-11).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는 자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사도들에게 “산 소망”(벧전 1:3)이었고, 삶의 열정을 가지게 된 동기였습니다(빌 3:12). 그들은 부활의 메시지로 인해서 당하는 핍박과 고난을 달게 받았습니다. 부활이 빠진 복음의 메시지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생생한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던 그 당시 초대 교회들 중에 하나인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의 근본을 흐리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전파된 복음의 내용이 분명한데 그런 일이 생겨난 것을 의아해 하며 질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고린도전서 15:44

특별히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부활이 없다’는 것보다 ‘몸의 부활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35절). 몸의 부활에 의문을 제기한 자들은 ‘형체 없는’ 부활에 신빙성을 두었습니다. ‘영’의 부활이 중요하다는 태도였습니다. 육은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매 한 가지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중요시하지 않고, 기독교를 영혼 수양의 종교로 여겼으며, 향락을 따라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영의 부활을 얘기하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일명 ‘환생 종교’라고 하는데, 그들은 영적 진화를 얘기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에서는 탄생과 죽음의 고리가 이어집니다. 달라이라마는 열 네 번 환생 하는 중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사후 세계를 보지도 않은 사람이 죽음 이후에 몇 곱절의 죽고 사는 문제를 그토록 확실히 얘기하는 것이 우습고, 사람이 탄생과 죽음의 고리를 벗지 못하고 계속 이 땅으로 ‘부활’해야 하는 ‘부활의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도 그들의 도를 숭배하며 따르는 수억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기독교의 개념으로,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 사단의 방법입니다. 부활의 가르침은 복음의 핵심인데, 사단은 에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가르침을 교묘히 왜곡해서 하와를 미혹했듯이 ‘부활’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복음과 완전히 다른 도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몸의 부활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 신경’은 세 번에 걸쳐, 죽음 이후에 ‘삶’을 말하며, 이것은 부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요약해 줍니다. 하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이요, 둘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이요, 마지막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신경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고백했는데, 이 ‘몸의 부활’은 단지 그리스도인만 아니라 이 땅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그 가운데는 생명의 부활을 맞는 자가 있고, 심판의 부활을 맞는 자가 있습니다(요 5:29).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산 자’이며, 영생의 삶은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죽음 이후로 이어져 그곳에서 계속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자는 여기서 심판을 받았고(요 3:18), 죽은 자이며, 육체의 죽음 후에도 영만 살아나지 않고, 이미 심판을 받은 몸이 부활하여,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져 사람마다 소금 치듯 함을 받습니다(막 9:43-49).

마귀의 자녀들(요일 3:10; 요 8:44)이 가질 삶이 지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질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 터로 가집니다(50절). 삶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위도식하는 곳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행하는 일은 항상 “주의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땅에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권고를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58절).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 하지 않을 일을 여기서 열심히 하라고 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고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며(58절),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부활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얻습니다(23절). 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까?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2절). 하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여전히 죽은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후로 따라올 하나님 백성의 ‘몸의 부활’을 미리 보여준 예표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자기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앞으로 가질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살아나신 주님을 보고 ‘영’으로 여길 때, 주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 24:39). 너무 기뻐서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달라 하시며, 친히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시기까지 하셨습니다(눅 24:42-43).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부활의 몸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께 붙어서 부활한 자들에게도 사망이 없을 것을 알립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그 때 멸망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6절).

육의 몸, 신령한 몸

바울 사도는 이 몸의 부활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35-58절). 그는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다고 말합니다(44절). 우리가 흙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하늘에 속한 “마지막 아담”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말합니다(49절). 그러나 그 신령한 몸이 “혈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며,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50절). 그러면서 바울은 몸이 부활하는 것에 관한 “비밀”을 알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잠자지 않고,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는 사건입니다. 이 때는 또한 사망이 삼켜지는 순간입니다.

변화된 우리의 형체는 실로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치 씨를 뿌릴 때 알갱이만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씨에서 나타날 장래 형체를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씨가 죽어야 비로소 각양의 종자로부터 나타나는 형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보는 다양한 육체, 곧 사람, 짐승, 새, 물고기, 하늘, 땅, 해, 달, 별들은 단지 ‘씨’들입니다. 죽음을 거치면 그 다양한 육체들로부터 어떤 모양들이 나타날지, 그것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나타나는 영광이 다 다르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장막으로 삼고 살았던 육체는(고후 5:1)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을 바라보는 자의 삶

성경은 몸의 부활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 곳에서 많은 말씀으로 가르칩니다. 그 가운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반문(反問)하는 형식을 빌어서,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두 가지로 말해줍니다.

첫째,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29절)라는 반문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하여, 혹은 그들을 대신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 죽은 후에 바뀔 수 있다는 가정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의 말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는 ‘죽는 예식’입니다. 바울 사도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물었습니다(롬 6:3).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것을 ‘세례’와 연결했고, 그의 새 생명과 연합한 것을 ‘부활’과 연결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세례는 헛되고 허무한 예식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속이는 종교 예식입니다. 살아나는 일도 없는데 무엇을 위해서 죽는 예식을 행해야 합니까?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세례는 ‘(아직 살아있으나 영으로) 죽은 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들에게 부활이 있음을 알립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아직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알려주려고 “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는 세례 예식’을 당당히 받음으로써 그들에게 세례의 참된 메시지와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바울은 “(또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30절)라고 반문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자기가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아무 유익이 없다면 차라리 내일 죽더라도 오늘 먹고 마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향락을 좇지 않은 이유로서 “부활”을 내세웁니다. 그는 날마다 죽는 것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속지 말라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삶을 자랑하던 바울은 연이어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33-34a절)고 경고합니다. 악한 동무들은 그 생김새가 악하기보다 그 삶이 악하고, 그 말이 악합니다. 그들은 부활의 소망과 전혀 상관없이 이 세상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믿지 않는 사람만 악한 동무들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부활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전하기보다, 긍정적인 사고를 앞세워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살 것을 부추기는 모든 목자들이 악한 동무들입니다. 그런 메시지를 따라 산다면 어떻게 날마다 죽을 수 있고, 어떻게 고난 받는 것을 기쁘다 하겠습니까? 부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어떻게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얘기할 수 있습니까? 나은 삶이라고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들이 다 땅에서 썩을 것들이 아닙니까? 사단의 간계한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기독교적인 모양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왜곡하고, 믿는 자를 미혹합니다.

악한 동무들과 어울리면 감각을 잃습니다(엡 5:19). 그렇지 않는다면 바울이 왜 “깨어나라(=감각을 되찾으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각’은 곧 생명과 같습니다. 지각을 사용하지 못하면 선악을 분변하지 못합니다(히 5:14).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각’을 선물로 받아 참된 자를 알게 되었고, 또 그 지각을 통해서 우리가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요일 5:2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22절) 모든 사람이 삶을 얻기 때문에 지각을 가진 것은 생명 안에 있는 것이요, 지각이 있던 사람이 그것을 잃으면 참된 자를 알지 못하고, 그 안에 있는 삶을 잃은 것입니다. 이것만큼 그리스도인이 부끄러워할 일이 없습니다(34절).

나오는 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을 자기 육체의 삶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합니다. 자기 열정을 몸에 쏟지 말고, 하나님께 쏟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삶이 천국으로 이어짐을 알고, 헛됨이 없이, 후회함이 없이, 영원히 남을 천국의 가치를 좇으며, 선악을 분변하여 항상 좋은 일에 힘쓰고, 주의 일에 열심을 내며, 어려움과 고난을 기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그 참 비밀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런 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부활의 순간을 소망하며,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이 땅에서 인내하고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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