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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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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42
겟세마네

신대현 목사

■ 겟세마네를 향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습니까?(33, 34절) 예수님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36절)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피하시려 하셨습니까?(비교, 요 10,11-12)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깨어있어야 했던 근본 이유는 무엇입니까?(38절) 자신의 문제를 벗어나서 주님의 마음을 안다면 지금 시대에 주님과 함께 깨어있어 기도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심한 고민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매우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느끼실 고통을 방불케 했습니다. 겟세마네를 향한 주의 마음은 “놀라고 슬프셨고”(33절) “심히 고민되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34절). 하지만 겟세마네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의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절). 이 기도는 세 번 거듭됩니다. ‘세 번의 기도’는 간절함이 표시이자 간구하는 자가 자기 뜻을 접고 온전히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결심을 상징합니다(참조, 고후 12:8).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그런데 왜 지금 이 잔을 옮겨달라고 간구하십니까? 그것도 세 번이나 간절히…? 그 이유는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바’로 불렀습니다(36절; 참조, 롬 8:15; 갈 4:6). 이 용어는 당시 유대 문화에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 앞에 어린아이로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교통이 가장 순전하고 가까운 관계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잔’이 예수님에게 임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의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거룩한 하나님이 예수님과 하나로 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 단절을 가져옵니다. 아담은 자기 죄로 하나님과 멀어졌지만 죄 없는 예수님이 생으로 아버지와 찢어져야 함은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닙니다. 비단 예수님만 아니라 ‘삼위일체’의 고통입니다. 태초 이전과 이후로 한 번도 나뉘어본 적 없는 삼위일체의 교통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사정없이 단절되고 멀어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놀라고 슬프게 했습니다. ‘이 잔’은 인간의 죄 앞에 삼위일체의 교통이 끊어져야 하는 사실,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 마가복음 14:33-34

인간의 존재 가치

이처럼 예수님은 ‘죽음’을 고민하지 않으셨고, 그 죽음이 동반하는 삼위일체의 ‘나뉨’을 슬퍼했습니다. ‘삼위일체가 나뉘지 않고도 십자가를 지는 길이 없을까…’, 이것이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신 절규의 내용이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36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 기도를 돕길 원하셨습니다(34, 37, 38절). 예수님은 그들이 기도의 깊은 내용을 모를지라도 ‘깨어있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민을 나눠 갖길 원하셨습니다. 실상 삼위일체가 나눠야 함에 대한 예수님의 고민은 ‘아담’의 문제로 인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할 제자들이 육신의 피곤함에 사로잡혀 비틀거리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답답함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40절) 예수님의 고민을 나누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조차 깨어있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력한 모습이란… 매 번 기도하신 후에 다시 돌아와 볼 때 제자들이 졸음으로 뒹구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마음에는 ‘삼위일체의 나뉨만이 인간 구원의 필연적 요구’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세 번째 돌아오셨을 때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 사이가 갈래로 찢길 만큼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실로 그렇게 존재가치가 있는 아담인데 과연 사람들 중에 이 사실을 알고 사는 이는 몇이나 됩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겟세마네 기도를 하게 만든 그 아담이 바로 우리였다는 사실 앞에 할 말을 잃습니다. 내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 그저 겸손과 침묵의 사랑을 하나님께 표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터져 나오는 회개와 감사는 나를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아바’를 외치며 달려가는 탕자의 외침,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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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제가 주님을 슬프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죄지은 아담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통하심이 얼마나 귀한데, 그걸 희생하시고 저를 얻으시다니… 주님 제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란 말입니까? 제가 주님께 그럴 정도로 잃어버릴 수 없는 존재였습니까?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슬픔과 놀람과 고민으로 인하여 지금 제가 여기 있다니… 주님 한 시라도 깨어있지 못하는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럽습니다. 주님, 그저 주님의 은혜를 바랍니다. 더 이상 주님을 고민하게 만들고 슬프고 놀라게 만드는 존재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깨어서 주님의 고민을 나눠 가질 수 있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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