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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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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65; 15:1-15
예수님, 대중의 정죄 그리고 십자가

신대현 목사

■ 예수님을 그토록 지원하며 따랐던 군중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문을 받는 예수님 앞에서 왜 한 순간 거짓 증거자들로 둔갑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실망한 것이 무엇입니까? 잠잠히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겠습니까?
■ 58절과 요한복음 12:19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인용하고 그 말을 거짓으로 몰아세운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참조, 고전 2:9-11)
■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결정적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15:15) 우리는 판단할 때 어떤 것을 근거로 삼습니까? 대중성입니까 진리입니까?

육의 눈이 낳는 거짓 증거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후 거짓 증인들이 증거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 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58절). 이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요 2:19) 자기들 말로 인용한 것입니다. 내용에는 별반 차이가 없으나 그들이 이 말을 예수님을 치는 증거로 사용한 데에는 땅에 것만을 아는 그들의 한계가 이유였습니다. 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전혀 이상하지 않고 당연한 진리를 말한 것인데 육의 눈에는 이 말처럼 괴이하게 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유사하게 인용했어도 그것이 영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를 몰아세우려고 내세운 것이면 ‘거짓 증거’입니다. 증거를 내세우는 자들이야 자기들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무슨 거짓말을 못하겠습니까? 그러하기에 예수님께 들은 얘기를 하는데도 서로 증거들이 합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56, 59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라도 자기 머리에 수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그 말씀을 몰아세우는 것이 ‘거짓 증거자’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다 거부하진 않았지만(참조, 1:22, 27) 경우에 따라 이해 못할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을 배역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눅 4:22, 29). 이러한 태도가 지금껏 하나씩 둘씩 모아져서 예수님을 치는 자리에서는 그들의 영적 무지(無知)가 온갖 거짓 증거들로 내세워졌습니다. ‘반쯤 믿음’은 참 진리와 양립할 수 없는 ‘인간의 태도’입니다. 믿는 자라도 그 걸음이 흐트러지고 때로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내 이해’로 취하고’, 그 안에 담긴 영적인 메시지까지 마음이 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러할 수 있고 그래서 거짓 증거자의 무리에 섞인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마가복음 15:14-15

대제사장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61절).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침묵을 깨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2절). 예수님은 다니엘의 예언이 예수님 자신을 통해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7:13-14).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개념을 더 넓은 성경의 정황에서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옷을 찢는 난리를 피며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해 버립니다. 한 가지는 알고 둘은 모르는 아둔한 영적 지도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임을 알면서 다니엘의 예언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그 분이 현실에 임해있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들이 바라던 식으로 임했어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종교만 아니라 세상 권력도 ‘땅의 것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했습니다. 영적 무지함은 서로 통하는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는 데에 한 통이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하셨습니다(2절). 빌라도는 이 말은 우습게 여겼습니다. 정말 심각히 정치적 사안으로 취급했다면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주장하는 예수님을 가볍게 취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문제를 대제사장과 사람들의 시기(猜忌)가 낳은 사건 정도로 해석했습니다(10절). 예수님이 당신의 왕 되심을 답했지만 빌라도는 ‘네까짓 게…’라는 생각에 예수님을 놀림거리로 삼아 버렸습니다.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는 이 어리석고 교만한 세상의 권력이여…!

대중의 지도자와 하나님의 지도자

사방에서 고소하는 소리에 잠잠하신 예수님의 침묵과 그 얼굴의 진실함은 빌라도의 마음에까지 예수님이 악한 일을 행할 사람이 아니란 결론을 가지게 했지만(5, 14절) 무리를 만족케 하려는 빌라도의 ‘정치적 판단’은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상 권력은 ‘무리의 만족’과 물려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진리를 대중과 바꾸는 일은 오늘에도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정치도 세상 못지않게 대중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수십억의 대중이 모였어도 그들의 요구와 주장이 하나님의 한 마디 진리만 못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지키는 ‘한 사람’을 떼로 몰려든 ‘무리’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과연 우리 믿음은 대중성을 탑니까 아니면 진리를 따릅니까?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무엇을 만족케 하려는 의도를 가집니까? 수많은 군중의 소리가 대세를 압도하고, 십자가의 형벌이 눈에 보인다고 우리 주님이 그들의 소리와 고난을 의식하여 양보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민란을 이끄는 지도자와 달랐습니다. 대중의 지도자이시기보다 하나님의 종이길 원하셨습니다.

군중은 언제나 자기들을 이끌어 줄 지도자를 바랍니다. 그래서인지 민란을 일으켰던 바라바를 예수님 대신 원했습니다(7, 11절). 그러나 하나님은 대중의 여세를 몰 수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외로운 길이라도 감내하는 참 지도자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지도자… 어느 시대이건 바로 이런 지도자를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여차하면 고소와 거짓 증거를 일삼고 고작해야 정치적 판단이나 내리는 그런 얄팍한 사람은 하나님의 치는 손에 넘어집니다. 결코 그런 편에서 세상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대중에 섞여 있다고 해서 정의에 서있다고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중을 이끌고 있다고 자신을 지도자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 외에는 누구도 그리스도가 아니며, 누구도 왕이 아니며, 누구도 지도자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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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은 하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늘 시민의 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땅의 것으로 풀려하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주의 진리가 다른 도덕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세상의 주장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치 없게 만들고 허황한 것으로 만들고 심지어 그런 자세로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태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제는 그런 태도가 기독교를 죽이고 있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짓밟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 예수님의 태도를 배웁니다. 그 태도를 지켜가렵니다. 사람들의 고소와 거짓 증거 앞에서 대들지 않고, 오히려 분명한 진리에 대해 굽히지 않는 그 모습을 제 모습으로 삼길 원합니다. 대중에게 흔들리는 간사함이 없게 하시고, 대중이 소리쳐 지지한다고 우쭐대지 않게 하시며, 주께서 걸어가라 하신 그 길을 벗어나지 않는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때로 외로움과 고통이 있어도 그 길에서 오히려 대중보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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