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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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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16
예수님께 향유 부은 여인

신대현 목사

새벽말씀 26:1-19 한 여자의 행한 일

■ 유월절은 어떤 절기입니까?(참조, 출 12:1-30) 왜 예수님의 죽으심과 유월절 절기가 연결되어 있습니까?(2절; 요 1:29)
■ 공식적인 지위를 가진 종교 지도자들은 유월절을 맞아 어떤 일을 꾸몄습니까?(4절) 그 일을 쉽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5절) 그들의 딜레마는 어떻게 풀렸습니까?(14-16절) 어떤 일이 잘 풀려나간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라면 딜레마도 해결해 줍니다. 이런 이유에서 일의 동기를 살핌이중요합니다. 지금 하는 일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왜 이 일을 하며, 또 어떻게 그 일을 해결해 나가고 있습니까?
■ 여인의 헌신은 복음과 함께 전해져야 했습니다(13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그 여인의 헌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돈 나눠주는 일보다 중요했습니까? 제자들이 비판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10절; 참조, 11절에서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 구제를 반대하지 않으셨음이 확인된다.)

예수님 죽음 앞에 사람들 모임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1절)…. “이 말씀”은 지금껏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모든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마쳐진 후 십자가 길이 구체적 현실로열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길은 ‘유월절’ 명절을 향해 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의 구속을 기념하는 절기로 그 중심에는 유월절 희생인 어린양의 죽음이 있습니다(출12:1-30). 모든 가르침을 마치신 후 예수님이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2절)고 말씀하심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온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위해 팔리고 죽는 일이 시작되리라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절정이 도래했음을 알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사람들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패를 이루어 모였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모임(3-5절)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모임(6-7절)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종교적으로 공식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유월절 전에(5절) 예수를 잡아서 죽일 궤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심각하게고려한 사항은 민심이었습니다(5절). 그들은 대중의 여론이 받쳐주지 않는 일을 공식적으로 행하다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를 피하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죽이는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딜레마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이고도 민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지 이것이 그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인간’ 모임은 대중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띕니다. 그런 만큼 지혜로운 권모 술수는 칭찬을 얻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이 ‘인간 모임’의일원이었습니다. 종교는 이름뿐이고 그 배후의 정치란 형언할 수 없이 더러운 궤계로 가득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본래 율법에 한 명밖에 임명될수 없는 대제사장이었지만 ‘대제사장들’이 즐비하고 ‘백성’의 장로들이 민요가 일어날 일을 꾸미는 것이 아이러니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딜레마를 사단이풀어줍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어찌 사단이 나서지 않겠습니까? 가룟 유다의 제안은(14-16절) 딜레마에 빠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기대치 않았던 해결책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를 잡아들이지 않고 예수의 측근이 팔아 넘겼다는 변명이 생길 수 있으니 이게 왠 횡재입니까? 하지만 일이 꼬이지 않고 잘 풀린다 해서 일의 동기마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묘책이 아닐 수 있습니다. 딜레마가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단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어디 딜레마뿐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치 않고 행하는 모든 일이 사단의 손에 이용될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26:12-13

복음과 함께 전해질 여인의 일

반면 ‘하나님 백성의 모임’은 그리스도를 의식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신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6절)라는 말은 믿는 백성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핍니다. 사람들이 심히 가까이 하길 꺼려할 ‘문둥이의 집’… 그곳에 거처를 정하시고 날을보내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실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런 주님 곁으로 주를 사랑하는 자들이 가까이합니다. 그 가운데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7절). 요한은 그 여인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로 밝힙니다(요 12:3).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 듣기를 사모했던 그 여인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에는 주의 말씀이 생동(生動)했고, 일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 죽음에 대한 언급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주님이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십자가 죽음에 대해 다시 언급하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고 제자들도 땅의왕국에 마음이 뺏기어 예수님 말씀의 영문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깨닫고 값비싼 향유를 주의 머리에 부어 헌신의 사랑을 쏟아내었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허비(虛費)’로 보였습니다(8절). 그들에겐 헌신의 동기보다 헌신의 ‘범위’가 중요했습니다. 또 헌신의 대상도 지극히 형식적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그렇게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며 살았을까요? 괜히 값나가는 물건이 자기들 보기에 허비된다고 생각하여 의례적으로 ‘가난한 자’를 들먹이고 괜한 여인만 ‘정죄감’에 싸이게 만든 것이 아닙니까?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의 일상 태도가 늘 이렇습니다. 제자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비판하는 기준을 느슨하게 적용하고 남에게는 ‘분을 내며’(8절) 비판하는 제자들… 그들의 비전이 ‘땅의 왕국’에 머물러 있는 이상 그 생각은 땅의 가치 기준을 벗어날수 없습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의 구제가 옳지 못해서 도리어 제자들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11절).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오신 주님’(눅 4:18)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9절) 가난한 자들보다 못하게 여겼습니다. 과연 가난한 자들이 누구로 인해 부해집니까? 마리아는 그 답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참사랑에 눈 뜬 그 여인은 예수님이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사람의 심령을 부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죽음은 그 여인의 마음에 너무나 무거운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부어주신 예수님께 자기 소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픈 소망을 일게 했고, 그 여인은 마침내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내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헌신을 ‘복음과 나란히 전해져야 할 일’로 자리매김해 주셨습니다(13절).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헌신하신 모습이며, 이 여인은 복음 앞에 사람이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마땅한 헌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과 여인의 일을 ‘함께’ 전하라고 명령하시며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모델을 알리려하셨습니다. 복음이 말만 아니라는 사실을 복음 전파 내용에 담아 주셨습니다. 또한 이 여인의 행함을 복음과 함께 전하는 자가 스스로 헌신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없음도 암시해 주셨습니다. 자기 것을 내놓지 않는 자는 복음을 정직하고 당당하고 담대하게 전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일을 복음과 함께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밖으로 향한 명령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향한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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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의 모임에 속해 있습니까? 마리아의 모습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잃어버리고, 엉뚱한 모임에서 파안대소하고 있진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만 헌신도 바르게 표현되어 나올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형식적인 기준에 맞추는 삶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가치를 알고, 주님의 때를읽으며, 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주께 드리는 것이 믿음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여인이 기억되어야 한다고 하신 명령을 제 마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먼저 돌아봅니다. 제 안에 그 여인의 헌신을 담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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