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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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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7-30
주여 내니이까?

신대현 목사

새벽말씀 26:20-35 내 몸과 나의 피

■ 기독교가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유월절을 지킬 방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물어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18절)라고 대답해 주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입니까?(참조, 21:8-9, 46; 26:5) 예수님과 대중은 어떤 관계였습니까?(참조, 요 2:23-25; 6:15)
■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였습니까?(25절; 비교, 22절의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른 호칭) 다른 제자들과 달리 가룟유다가 나눠 갖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26-28절) 내게 주의 몸과 피는 어떤 의미입니까?

대중의 지지와 제자의 등 돌림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자의 대접을 받으며 들어오신 이후(21장) 무리는 그를 선지자로 여겼고(21:46), 예수님을 따르는 무수한 사람들로 인하여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감히 무서워 예수님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21,46; 26,5). 유월절 잡수실 것을 어디서 예비할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을 때 “성안 아무에게 가서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말하라고 대답해 주실 만큼 예루살렘 성 안에는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포함하여 무리들의 머리 속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서로 딴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라’고 얘기하시며 제자들을 보내셨을 때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내 때’를 바르게 이해하고 집을 찾으러 나섰고, 성안에 예수님 지지자들이 이 말을 알아듣고 집을 내주었을까요?

처소가 마련된 후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앉아 식사를 나눴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절).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심히 근심”(22절)한 것으로 보아 이 말에 대한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혁명’이 거의 이뤄진 상황에서 배역자가 나올 것을 말씀하셨으니 그것도 예수님의 ‘예지력’을 이미 누차 체험한 제자들로서 이 말의 심각성을 제쳐둘 수 없었습니다. 이미 배역자를 알고 있듯이 말씀하신 예수님 앞에 제자들은 한 사람씩 나아와 ‘주여 내니이까’(22절; 참조, 헬라어 원문-‘주여 확실히 저는 아니지요, 그렇지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자기는 아닌 사실을 예수님께 확인해 내려는 듯 서로 앞 다투어 다그치며 물어보는 제자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 마태복음 26:25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23절). 그 당시 식사 문화에서 사람들은 이 사람 저 사람 그릇 안에 손을 넣어 음식을 꺼내먹었습니다. ‘함께 손을 넣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넣을 만큼 그릇이 크거나 두 사람이 앞 다투어 먼저 음식을 꺼내려고 질서 없이 식사하는 모습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런 상황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참조, 요 13:26 -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함께 손을 넣는’ 것은 예수님을 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나눌 정도로 측근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확인해 주는 말입니다(참조, 눅 22:21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

예수님과 가룟 유다의 대화는 이런 놀라움이 잠시 지난 후 심히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것입니다(25절). 그는 “랍비여 내니이까”(참조, 22절, 랍비여, 확실히 저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동일한 질문을 던질 때 그들이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것과 대조적으로 유다는 주님을 “랍비”로 불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없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저 가르침이 있어서 따라다니는 관계, 하지만 자기 뜻에 더 이상 받아들일 것이 없을 때 언제라도 저버릴 수 있는 관계, 바로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런 관계 안에 존재였습니다. 그는 겉으로 혁명을 꾀하는 선동가였지만 내심 돈으로 한 몫 보려는 욕심을 품었고(요 12:4-6), 상황이 바뀌면 혁명의 선동가에서 정치의 앞잡이로 바뀔 수 있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요 18:3). 그는 영적 분별력 없이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따랐고, 심지어 사단의 생각에도 마음을 열었습니다(요 13:2). 끝내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지를 견디지 못해 자살했습니다(27:3).

어디 가룟유다만 그러합니까?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렇습니다. 자기 꿈을 실현해 보려고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들과 관계를 기계적으로 혹은 기회적으로 맺고,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언제라도 등을 돌리며, 결과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기 분에 못 이겨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생을 비관으로 마치는 사람들이 세상에 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땅에 지으신 목적을 생각할 때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한 인생으로 스스로를 몰아갑니다(24절). 가룟유다의 인생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으로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무엇을 향해 살며 어떤 책임을 가지고 사느냐에 존재가치가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주의 몸과 피를 나눈 참 제자

예수님의 참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로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몸과 피를 나눠 마셨고, 예수님이 그들의 ‘생명’이었습니다(26-28절).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그들에게 있었고 주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러 감람산으로 향하실 때 멋모르고 찬미하며 주를 따랐어도(30절) 그들에게 주의 몸과 피를 나눈 사귐이 있고 그 사귐 안에 주님이 ‘주(主)’를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을 심어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넘어져도 일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정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온전치 못하지만 ‘주님과 피로 맺은 언약’ 안에서 인생의 꿈과 주를 향한 사랑을 갖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힘을 얻어 주께서 이루실 ‘아버지의 나라’(29절)를 바라며 삶의 여정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대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대해주신 관계와 베풀어주신 사랑이 있는데 어찌 우리가 비인격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를 주께 보일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의 몸과 피가 내면에 흐르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제 삼자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야 주의 살을 뜯고 주의 피를 흘리고 자기 죄를 마신다지만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렇게 주를 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는 주의 몸 안에 거하고 주의 피안에 잠겨 있습니다. 주님과 나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가까움은 서로 안에 거하고 있음을 통해 확인됩니다. 주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심이 기도 중에 느껴지고, 내가 주 안에 있음이 주의 말씀으로 확인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소중히 여겨야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지시고 내 몸과 피 대신 자신의 몸과 피로 죄의 심판을 대신 당해 주신 주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내 몸과 피만 볼 것이 아니라 주의 몸과 피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안에 주와 동행하는 즐거움으로 인하여 부르는 찬미가 진실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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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예수님 주위에서 인기를 얻어가던 제자들의 모습을 십분 이해합니다. 주님이 잘 되는 것이 또한 제자들의 형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기몰이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기를 얻자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고난 앞에 심히 놀랐던 제자들! 그러한 놀라움이 제게 없는지요? 주님으로 말미암은 제 기쁨이 고난이란 정황에서도 변치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주님과 맺은 관계가 주의 몸과 피를 나눠서 맺어졌음을 기억합니다. 제 생명이 주 안에 있고 주의 생명이 제 안에 있음을 항상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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