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27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

신대현 목사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잘못을 뉘우치는 데에 그치지 말고 새로움을 다짐할 수 있길 바란다. 여기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다짐해 보고자 한다. 그 다짐을 통해서 더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자아와 더 분명한 삶의 목표를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함을 배워야겠다는 다짐이다. 19-20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시편 37편 7-9절은 이 구절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찌어다 *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Those who wait upon the Lord)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말을 더디 하고 분 내기를 더디 하는 것은 결국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인가.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어떤 모습인가? (시 37:1-6) 무엇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것인가?

그것은 보는 것으로 인생을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시편 37:1-3). 어떤 성품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실함'이다.

시 37:1-3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약속에 인생을 맡기면 그때부터는 그 약속이 인생을 목적지까지 확실하게 이끌어간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確信)하노라"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있기에 가능하다. 하나님의 성실한 성품을 먹고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보장이요 가장 확실한 건강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야고보서 4:22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기뻐한다(시 37: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결론을 내리지 않은 이상 자신의 현 모습에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에겐 소원이 생기고 여호와를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다(느 8:10). 우리의 결론은 하나님께 있기에 그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소원은 기도로 바뀐다(시편 37:5-6).시 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기도는 내 길을 인정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분께 길을 맡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셨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물며 우리가 여태 우리 뜻을 못 버려서 안간힘을 쓰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그러한 자를 통해 하나님은 의를 빛같이 나타내신다(6절).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신다. 그것은 보기에는 사람의 의 같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의이다. 야고보서 20절도 말하듯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는데, 왜 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인가.이는 결국 우리의 의는 더 이상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의 행함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드러내는 통로가 되는 것을 암시한다. 이 얼마나 영광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나를 통해 드러내신다는 사실이... 나의 의, 나의 공의를 빛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다니...

여호와의 성품을 아는 자가 잠잠할 수 있다. 내 인생의 결론이 여호와께 있는 것을 아는 자가 잠잠할 수 있다. 그리고 길을 맡긴 자가 잠잠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은 분내는 것이요 불평이며 행악이다. 듣기는 느리게 하며 말하기와 분냄은 속히 하게 되는 것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나는 얼마나 주님 앞에 잠잠했는가. 나는 얼마나 참아 기다렸는가. 행악하는 자를 비판하다가 나 자신도 얼마나 분을 내었고 똑 같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의를 감추는 자가 되진 않았는가. 하나님의 의는 분을 내는 것으로는 결코 그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귀를 내어드리자. 하나님의 소리에는 민감하고 사람의 소리에는 중심을 잃지 말자.

하나님께 입을 내어 드리자.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데에는 입을 다물고 여호와께 소원을 아뢰는 데에는 크게 벌리는 입이 되자.

하나님께 마음의 감정을 내어드리자. 행악을 내 뜻대로 처리하려 하지말고 나의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나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만사의 결론을 드리자.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내 귀, 내 입 그리고 내 마음은 이제 주님의 손에 있게 하자. 이것이 주 앞에서 잠잠함을 배우는 시작인 것이다.

둘째는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겠다는 다짐이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의 잠잠함에 대한 결론으로 이끈다. 시편 37편에서는 하나님의 성실함을 먹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길을 맡기는 것을 잠잠함의 길로 제시했는데,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야 하나님의 성품을 어찌 알 것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야 어찌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야 어찌 하나님께 길을 맡기겠는가.

그래서 야고보서는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다.

시편 37편도 잠잠한 자의 모습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시 37:30-31)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가 이제껏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어서 말씀이 마음에 없는 게 아니다. 21절은 '마음에 심긴 도'라고 말한다. 이미 우리 마음에 말씀이 심어진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말씀이 마음에 심어진 것과 그 말씀이 생명으로 자라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에 심겨진 말씀이 생명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그것은 말씀의 기운을 막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려야 한다. 무엇이 더러운 것이고 무엇이 넘치는 악인가. 이런 것들이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각양 좋은 선물들과 대조된다고 할 때에 야고보서가 가르쳐 주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의 가장 근본 모습은 그 보다 앞선 구절인 15절에 나오는 것처럼 '욕심'이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NIB James 1:15 Then, after desire has conceived, it gives birth to sin; and sin, when it is full-grown, gives birth to death.

마태복음 13장 22절은 이렇게 달리 표현한다: 마 13:22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다". 왜 마음이 더러워지는가. 왜 마음에 악이 넘치는가. 이권이 개입되면 그리되지 않는가. 부부간에 싫은 소리가 왜 나오며, 아는 사람들 간에 언성이 왜 높아지고 신경질이 왜 생기며 짜증이 왜 나는가.그 근본에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것, 뭔가 더 얻어내려는 것. 죄는 욕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15절은 말하지 않는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려면 그 근본인 '욕심'을 버려야 한다. 나는 한 해 동안 무엇을 성취하려고 했던가. 그 꿈은 욕심이 잉태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장해 주는 비전이었는가.

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움트게 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내 안에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온유함이란 뜻의 '프라우테스'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들을 다루는 태도와 관계해서 사용되는 단어인데 행동이 거친 것과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움을 묘사한다(참조, 엡 4:2; 딤전 6:11). 다정한 우정을 특징짓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말씀에 우정을 더해야 한다.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내 안에 심긴 말씀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한 해 많은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가.

NIV는 '온유함으로 도를 받으라'는 말을 'humbly accept the word'로 번역했다. 겸손히 몸을 굽혀 말씀을 받으라는 말이다. 말씀이 주가 되고 내가 종이 되라는 말이다. 한 해 동안 말씀이 '주'가 되고 내가 '종'이 되어야 했을 터인데 내가 '주'가 되고 말씀이 '종'이 되진 않았나. 지금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는 내 안에 심겨지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겸손함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씀을 사모함이 우리의 마음에 있게 하자.

그러나 말씀을 받는 것은 여기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자는 그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진리를 행하는 나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는 진리를 행하겠다는 다짐이다. 22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진리를 행하지 않는 자는 마치 거울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24절). 무슨 말인가. 말씀을 실컷 듣고도 그 말씀을 곧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25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말씀을 잊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여태껏 진리를 그렇게 많이 알고도 실행치 못했는가.

그 이유는 26절에 나와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혀로 진리를 다 까먹은 것이다. 진리를 듣고 또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경건하다(religious)고 생각하고 자기를 종교인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함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를 금방 알게 된다.

혀를 재갈 먹이지 않고 멋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해대는 사람이면 이제껏 믿노라고 내세웠던 자신의 모습은 사람들에 의해 경멸을 당한다.

말을 하는 당사자야 그걸 알겠는가. 자기는 여전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지... 이런 경우 그의 멋대로 하는 말은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믿고 있는 '경건(Religion)'이 헛것이란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이다. 기독교는 바로 내 모습 정도다라고 만천하에 공포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

진리를 행하는 것은 '진리에 비추어 생각을 정리하고' '정리된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로 표현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진리를 행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27절에 나와있다.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동정심을 상실하고 살았기에 진리를 행하지 못한 것이다.

말씀이 임하면 그 안에 사랑이 같이 임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뭉클한 가슴이 같이 임한다. 뭔가 비어있고 뭔가 깨져있고 뭔가 호소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왜 이제껏 나에겐 그런 동정의 마음이 없었는가. 그것은 '정상적인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세상에 사는 것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정상인을 더 정상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이 진리이다. 우리가 진리를 행하지 못한 데에는 우리 자신조차 별 부족함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가. 그러니 남들 부족한 것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마음이 손으로 가고 믿음이 발로 가는 신앙... 그래서 과부와 고아, 나그네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 전혀 삶의 수단을 동원해도 돈을 벌어들일 수 없는 자들... 형제들의 베풀어주는 정도만큼만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자들... 그런 자들을 우리 안에서부터 돕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안전(security)', '보장'이란 단어를 세속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정작 베풀어야 할 손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눈에는 세상에 있는 은행만 보이고 천국에 있는 은행은 안 보이는 것인가.

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하라"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하늘의 은행구좌를 텄는가. 밸런스가 얼마인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했는데 우리의 베푸는 손길이 우리 가운데 없는 자에게 뻗쳐 있지 않는데 어찌 그들을 향한 마음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기를 지켜야 한다: 27절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삶의 가치기준을 바꾸어 사는 것을 말한다. 누구도 행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는 없다. 다만 어떤 생각으로 행하고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진리를 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그야말로 삶이 없는 사람들이란 얘기가 아니다. 여전히 삶의 활동은 하되 그 행함으로 나오는 활동이 전혀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얼마 남지도 않은 삶인데 언제까지나 세속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굳이 '진리를 행하라'는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의 삶이 그의 행함일 텐데 그 사람의 신분이 그리스도인으로 바뀌었다면 당연히 그의 행함은 그리스도인의 행함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진리를 행하는 삶에 대한 도전을 받는 것은 여전히 세속에 몸을 담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 해를 돌아보아 내 생활 태도를 보기 이전에 내 생각의 태도를 보자. 과연 진리는 내 생각을 다스려 왔는가. 이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순간, 나의 생각은 진리로 붙들려 있음을 알자. 이제부터의 나의 모습은 걸어다니는 진리, 걸어다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자.

결론적으로 우리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입과 귀를 통해 살아있고, 마음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이 곧 기독교의 모습을 보이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한 해는 가고 한 해는 어김없이 온다. 그러나 이것도 그칠 때가 올 것이다. 엄연한 현실 앞에서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고, 하나님의 진리를 행하다가 하나님께서 영원한 본향으로 부르시는 날에 고개를 든 모습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모습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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