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22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신대현 목사

[애통함] 3:14-22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세대의 정신: 탈의 문화

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탈을 쓰고 살게 만든다. 진리를 따라 특별나게 사는 것보다는 대세에 합류하길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 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狹窄)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세대를 비유한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다: 눅 7:31-34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장단에 맞춰 살기를 강요하는 것이 이 세대의 정신이다.

그러나 대세에 합류할 때 우리에겐 위선이라는 것이 생긴다. '위선'이라 함은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자기의 육체를 자기의 본 모습인양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육체는 '장막'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5:1). 육체라 함은 '살'만이 아니라 육체로 인해 갖게되는 모든 삶을 말한다: 살 - 외모, 근육 / 체형 - 멋, 유행, 옷 / 입 - 음식, 연설 / 눈 - 美, 스포츠, 예술 / 머리 - 학문

이 모든 것에서 나오는 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우리는 '문화'의 탈에 의해 이제껏 나 자신을 규정해 왔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내 실체가 겨우 이 '문화'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인가?

대세가 그러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다가, 욕심이 생기면 이왕 내친 김에 그 대세를 자기가 끌어보려고 하는 정도에서 인생은 허무하게 마쳐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요한계시록 3:20

인간의 존재 의미가 발견되는 곳: 그리스도

그러나 인간은 어떤 탈을 썼느냐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 사실에 의해서 그 존재 의미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후 5:16-17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 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인간의 탈들이 행렬하는 대세에서 그 삶의 기준을 달리 볼 수 있는 것은 육체대로 자기를 알지 않고 '그리스도'가 계신 삶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Context, 그리스도가 계신 삶의 정황, 그곳에서 자기 모습은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다(new creation).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명해 보기로 하자.

위선의 탈과 영적 실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17절--"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 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인간의 자기 평가와 하나님의 판단은 극단적이다. 인간의 판단은 '위선의 정당화'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탈을 벗은 인간의 실체'를 드러낸다.

라오디게아는 로마시대에 소아시아 고대 국가였던 프리지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은행의 중심지였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안과(眼科)학과 직물 산업이 유명했다.

이러한 '재정적인 성공'과 '의료의 발달'과 '환경의 부유함'은 참된 영적인 상태를 가리웠다: --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17절)

주님이 이 교회를 향하여 '네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절)라고 지적하신 것은 바로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의 이면에 숨어있는 영적인 실체를 가르쳐 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어떤 영적 실체를 드러내실까?
특별히 유교문화에 젖어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지적하지는 않으실까?

'네 비도덕적인 것과 거짓 모양으로 선한 행세를 하려는 것과 너를 지은 참된 아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불효를 알지 못하느냐?'

껍질을 벗기는 일은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진실'을 만나기까지는 진실에 대한 기준을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원하시는 모습을 가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함 안에서 드러나는 나의 실체

영적으로 속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크리스천들에게 성령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소개한다:'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14절).

'아멘'과 '참된 증인'은 신실함과 진실함을 대변한다. 여기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현실을 예수님의 진실함 속에서 찾게 해 주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주님의 진실함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신 데에서 발견된다. 율법의 기준들에 얽매여 있던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 분은 참된 진리를 가르치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세상의 외식적인 가치기준을 벗어날 길은 오직 진리밖에는 없다는 얘기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신 것은 사람의 인생이 시작된 곳이 바로 주님이란 사실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사람이 가지는 외적인 환경은 사람을 속일뿐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 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을 때에야 비로소 인생의 참 모습을 찾게 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크리스천의 뚜렷한 자아를 가지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닮지 못하고 위선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미지근한 물에 비유되었다(16절).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는 그 행위에 있어서 세상의 지혜를 따르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라오디게아는 지리적으로 찬 생수가 나오는 골로새와 온천수가 나오는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두 지역에서 흘러오는 물은 라오디게아에서 언제나 미지근한 물로 바뀌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의 지리적인 위치를 비유로 들면서 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 확실하게 크리스천의 자아를 가지고 살 것을 종용하셨다.

크리스천은 18절이 암시하듯이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부요(금)와 참된 치료(안약)와 참된 멋(흰옷)을 가질 때에 차든지 뜨겁든지 확실한 크리스천의 자아를 가진다.18절--"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 이 모습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시는 것이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사랑함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이 있겠는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히 12:4-11).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회개하고 열심을 낼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결과를 약속 받는다:'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0절).

여기서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가장 흔한 일상 생활을 함께 나누는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천의 회개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모습까지 하나님께 열어드리는 것이며, 그리할 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열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대하고 주님을 발견한 자에겐 삶의 가장 근본부터 진리로 다시 바꾸려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크리스천들에게 실체를 가르쳐 주시고 열심을 일으키려 하신 것은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 지음 받은 목적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그리고 그 일은 이 땅에서 만의 일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시작된 삶은 영원히 지속되는 삶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 자라가야 한다면, 인간이 어찌 단기간에 하나님을 닮을 수 있겠는가.

이는 영원한 삶의 진행인 것이다. 그 일의 시작은 바로 가장 흔한 것에서부터 하나님과 나누는 삶이다. 그러한 크리스천은 이 땅에서 가장 흔한 일까지 나눌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까지 함께 나누는 관계를 가지게 된다 (21절).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주님은 그 영광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을 위한 삶의 열심을 요구하신 것이다:21절--'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계 22:5).

성령의 소리를 들으라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들은 헛된 가치들로 꾸며댄 위선을 벗어버리고, 깨어 있어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22절--'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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