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처음 행위를 가지라

신대현 목사

메시지를 열며...

요한계시록을 펼치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고 말씀하는데 실상 계시록만큼 멀리하고 있는 말씀도 없다. 과연 읽는 것과 듣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그 어려운 말씀들을 지킬 수 있는가.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21세기를 맞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계시록인 것을 발견한다. 계시록에는 2-3장에 일곱 교회에 대한 편지가 나온다. 그 메시지는 일곱 교회만이 아니라 역사상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4장 이후로는 그 교회가 세상의 도전에 맞서 마지막 심판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보존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가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구조로 보면 2-3장은 교회를 향한 메시지요, 4장 이후로는 성도들이 그 메시지를 읽고, 듣고, 지키는 가운데 세상에서 겪을 일들이라고 하겠다. 그러하니 일곱 교회에게 준 메시지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결코 멀리할 것이 아니라, 시대가 악해져 가는 우리의 현실에서 가장 가깝게 접하고 묵상해야 할 말씀인 것이다.

에베소 교회

먼저 제일 처음 메시지가 전해진 에베소 교회를 대하면서 우리는 형식과 원리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교통 신호등은 빨간불, 녹색불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이라는 원리를 그 안에 담고 있다. 또 구약의 안식일은 이것이 일이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니라, 자기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쉼'을 가지며 또 베풀고 있느냐란 원리를 담고 있다. 정작 원리를 모르면 형식은 맹목적인 규율이 되어 사람을 옥죄이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Stop judging by external standards and judge by true standard(Good News Bible, 외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를 그치고, 참 기준으로 판단하라-요 7:24)". 그렇다. 사실 형식적이 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안식일 규례'와 '서로 사랑하라는 규례'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후자는 그 범위가 넓고 깊기 때문에 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이 전자를 택한다. 내면보다는 외모로, 원리보다는 형식으로 종교성을 나타내려는 것이 흔히 사람들이 쉽게 취하는 태도이다. 그러다 보니 규율이 많아지고, 정죄가 심화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요한계시록 2:5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종교적이고 형식적이 되어 가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 ."(2절) 어떤 행위, 어떤 수고, 어떤 인내인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행위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는 수고와 또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인내이다(2, 3절). 이것이 틀린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형식만 남게 된 행위들이라면 에베소 교회의 행위들은 교회 안팎에서의 게슈타포 노릇이나 다를 바 없다. 교리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을 발본색원하려는 극도의 노력... 옆의 교회가 우리와 다른 교단 패를 걸어 놓은 것만 갖고도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태도...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돌면 즉시 교리적인 공격과 방어태세를 갖추는 긴장감... 

주님은 이 교회를 향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명령하셨다. 그 행위는 처음 사랑과 연결된 행위였다(4절). 곧 '처음 사랑이 동기가 된 행위' 바로 그것이 처음 행위였다. 과연 어떤 행위를 두고 말씀하신 것일까.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첫사랑을 회복해 주신 장면이 나오는 요한의 기록으로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 주셨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야기의 끝이었는가. 아니다. 주님은 매번 사랑을 확인하실 때마다 그 끝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15-17).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첫사랑으로 말미암은 처음 행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는 '목자의 일'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에베소를 떠나면서 바울이 부탁한 말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행 20:28-32). 그는 자기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양떼를 어그러진 길로 끌고 갈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그들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하기보다 성도들 각자가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들이 될 것을 권면했고(NIV, 'Be shepherds of the church of God' 행 20:28), 또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세워갈 것이라고 확신에 찬 말을 던졌다. 처음 사랑, 처음 행위는 이처럼 '교회'를 그 정황(Context)으로 하며, '목회'를 그 원리로 가진다. 교회를 잃으면 처음 사랑을 잃는 것이요, 목자의 마음을 잃으면 처음 행위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라는 정황'을 잃어가고 있는가. 교회는 그저 예배만 보면 되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에게도 터치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주님과의 첫 사랑은 간직하고 싶어서 특별 집회 때나 되면 울고불고 눈물콧물 흘리며 뒹군다. 과연 누구와의 첫사랑이며 무엇을 위한 몸부림인가. 처음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 첫사랑이란 게 주님 안에 존재하는가. 교회 없는 첫사랑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주님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5절). 처음 사랑의 회복은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원리'를 회복하는 문제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생각'해야 한다: 교회적인 사명이 없는 개인의 부르심은 없다는 것을..., 처음 행위 없는 첫사랑의 회복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 '다른 교회로 옮기면 되지' 내지는 '목회는 목사의 책임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귀 있는 자는'(7절)이라고 부르는 주님의 소리가 각 개인을 향해 단수(單數)형으로 임한 사실을 주목하라.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를 듣는 자는 '나'이다. 교회의 책임이 물어질 자는 '나'이다. 교회의 싸움은 곧 '나의 싸움'인 것이다.

우리는 형식을 벗고, 원리를 회복해야 한다. 외모를 던져버리고 내면을 회복해야 한다. 개인주의를 버리고 교회의 정황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다고 형식 없는 방종을 취하자는 게 아니다. 니골라당은(6절) 기독교의 믿음에 우상과 음행을 섞었다. 그들의 주장은 자유였다. 그러나 진리가 안겨준 자유(요 8:31-32)는 율법의 형식주의로부터의 자유이지 결코 원리까지 세상과 섞어도 되는 자유는 아니다. 결코 사단과 하나님이 하나일 수 없고, 동성애가 교회에 버젓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문제이다. 원리회복은 진리회복이다. 그리고 그 원리의 뿌리인 첫사랑과 처음 행위의 회복은 개인의 삶에 '교회라는 정황'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은 물으신다: '너에겐 교회가 있느냐'. '너에겐 교회를 위한 꿈이 있느냐'. 교회를 잃은 그리스도인들은 촛대를 빼앗긴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빛을 담고 있지 않는 촛대는 가치가 상실된 촛대인 것이다(5절)

닫는 말

일곱 사자(messengers)를 상징하는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 주님은(1절) 끊임없는 메시지를 보내신다.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주님은(1절) 교회의 영적 생명을 지키고 돌보신다. 그 주님의 소리를 듣고 그 주님이 돌보시는 교회를 돌보는 일... 바로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사명이다. 편한 대로 말씀을 취하고 버리는 자가 될 것이 아니며, 두루마기를 항상 빨아 입고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계속 지켜 가는 자로 살면서(계 22:14, 19) 끝내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는 승리자가 될 것을 다짐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

주님,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 또 주님과의 첫사랑은 끔찍이 지켜가고 싶어하면서, 교회는 점점 귀찮아하고 멀리하고 그저 신앙을 형식으로 만족해하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을 보면서 혹 제 모습은 어떠한지 돌이켜 봅니다. 첫 사랑이 동기 되어 나타나야 할 처음 행위가 과연 제게도 교회를 정황으로 하고 있는지 생각할 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허구한날 새로 계획은 짜면서도 개인의 비전만 생각했지, 교회를 중심으로 놓고 주님과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는 제 모습이 마냥 부끄럽습니다. 주님,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들려주시면서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해 주셨던 그 사건을 마음에 다시 새겨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양떼들인 형제들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주님, 돌이키는 제 모습을 받아주시고, 주님의 돕는 손으로 힘을 더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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